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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죽고 싶어서 미친놈이래.” ‘BL’물, 소위 말하는 ‘야오이’계에서 골수 마니아 팬들을 거느리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만화가 중의 한 명 야마시타 토모코, 국내에도 많은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그 대부분은 ‘남자...
2012-09-07
석재정
“한마디로 말하자면 죽고 싶어서 미친놈이래.” ‘BL’물, 소위 말하는 ‘야오이’계에서 골수 마니아 팬들을 거느리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만화가 중의 한 명 야마시타 토모코, 국내에도 많은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그 대부분은 ‘남자들의 사랑’을 다룬 동성애 장르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 작가의 작품이 모두 다 ‘남성간의 동성애’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학산문화사에서 한국어판 1권이 발행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버터!!”라는 작품은 고등학교 사교댄스부의 일상을 다룬 스포티한 느낌의 청춘물이고, 삼양출판사를 통해 발행된 “HER”나 “미러볼 플래싱 매직” 같은 단편집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비일상적인 느낌의 사랑이야기나 인생이야기를 다채롭고 독특한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꼭 위와 같은 예를 들지 않더라도, 야마시타 토모코가 만화가로서, 특히 순정만화가로서 굉장히 독특한 문법과 역동적인 속도감을 표현할 줄 아는, 재능 넘치는 작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출간된 작품이 일반적인 장르보다 야오이장르가 월등히 많은 것뿐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MO`SOME STING”이란 작품도 게이가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라는 알베르 카뮈의 질문과 흡사한, 아주 진지하고 무서운 질문이다. “무섭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거든? 이 망할 아저씨야!” 이 작품에는 총 다섯 명의 주인공과 평범한 조연 하나, ‘끝판 왕’ 같은 느낌의 무서운 조연이 한 명 등장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확고한 삶의 태도를 지닌 강인한 여고생 토와코, 두 번째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은 ‘상냥하게’ 대하는 거친 게이, 야쿠자 아사기, 세 번째 주인공은 모든 일이나 관계에 있어 60%만의 힘을 쓰며 대충대충 사는 이기적인 남자, 선악의 유무와 관계없이 돈만 밝히는 보험설계사 이타치, 네 번째 주인공은 아버지의 삐뚤어진 가정교육 탓에 남을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피를 좋아하는 망가진 남자, 바이섹슈얼 새디스트 왕 후웬, 다섯 번째 주인공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매일매일 죽고 싶어 하는 남자, 마조히스트 변호사 타누키다. 평범한 조연은 사건과 인물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의 여자, 아사기의 변호사 쿠지라이고, ‘끝판 왕’ 같이 무서운 조연은 왕 후웬의 아버지이자 이 거리 야쿠자들의 정점인 차이나 마피아의 두목, 잔인하고 사나운 남자 왕 젠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인간 같지 않은 형편없는 아버지’의 실수 덕분에 차이나 마피아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 여고생 토와코가 상대편 야쿠자 조직의 간부이기도 한 외삼촌 아사기의 보호를 받아 일시적인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도피생활 와중에 타누키, 이타치, 왕 후웬 등이 모두 엮이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결국 막판에는 용감하고 강인한 소녀 토와코가 ‘악의 정점’인 ‘왕 젠마’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면서 모든 사건이 무사히 종료되지만, 이 도피사건을 계기로 네 남자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 한 가지씩 ‘조그만 변화’가 생겨난다는, 한 편의 소동극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다. “타누키, 토와코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 대부분의 죽음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해...본인의 탓이 아니지... 그럼에도 그 녀석은 살기 위해 죽기살기로 몸부림치고 있어. 그에 비하면...죽고 싶어하는 네 모습은 너무도 추해.” 이 작품의 매력은, 등장인물별로 나뉜 다섯 개의 에피소드와 결말을 보여주는 마지막 에피소드로 분류된, 이야기의 다양성이다. 스토리의 구조는 명확하게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가는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느낌이지만, 중간에 뒤섞이는 여러 인물들 각자의 사정과 ‘사건의 중심 토와코’를 대하는 각기 다른 삶의 태도가 여기저기서 좌충우돌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를 불러온다. 야마시타 토모코 특유의 속도감 있는 연출방식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한 몫 하지만, 작품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요인은 역시 각기 다른 성향과 뚜렷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가 다채롭게 엮여가는 지점에 있다. “너만 손에 넣으면 살아갈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작품은 지극히 비일상적인 공간에 일상적인 인물을 하나 집어던져 버리면서 아주 독특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여자 주인공인 토와코는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싶을 뿐인’ 평범하고 똑똑한 여고생이다. 자기 잘못도 아닌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무서운 인간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숨어 지내고 있는 자신의 현재 상황이 너무도 부조리하다고 느끼고 있고, 그것에 분노하고 있다. 토와코의 바람은 그저 학교에 다시 나가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계획했던 자신의 인생을 다시 걸어가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서 토와코는 비록 힘없는 여고생일 뿐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가지고 결핍된 인간들’이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망가뜨리는 것에 대해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다. 이 작품 내내 유지되는 ‘긴장된 감정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평상시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상하고 무서운 나라에 갑자기 갇혀버린 평범한 여자아이’라는 설정 말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지점은 ‘인물들 간의 관계설정’에 있다. 사실 토와코의 외삼촌인 야쿠자 아사기나 죽고 싶어 하는 변호사 타누키, 돈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보험설계사 이타치, 폭력을 써서 남을 망가뜨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왕 후웬은 다 ‘어딘가 망가진 비일상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결핍된 어떤 것’을 가지기 위해 남을 상처 입히고, 협박하며, 때론 죽이기도 서슴치 않는 ‘악인들’이다. 야마시타 토모코의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은 바로 이 ‘비정상인 인간들’의 관계를 ‘엇갈린 사랑’으로 엮어버리는데 있다. 아사기는 타누키를, 타누키는 이타치를, 이타치는 토와코를, 왕 후웬은 아사기를 ‘서로 엇갈린 채 원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서 등장인물들은 계속 결핍되어있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대한 갈망은 점점 집착으로 변해 결국 폭발해버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비겁하지 않게, 진심을 다해 살아가다 보면 죽기 전에 어렴풋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힘내.” 작가는 결말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진리 하나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왜 살아가야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러브!”라는 진리 말이다. 다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재미난 위로’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