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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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와 시리즈 세트 (나와 그들과 그녀의 이야기)

“당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면 일찍 죽게 될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만화가 토지츠키 하지메의 ‘나와 그녀와 시리즈’가 애니북스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토지츠키 하지메는 이 시리즈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현대지능개발사나 삼양출판사의 ‘...

2012-09-05 김현우
“당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면 일찍 죽게 될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만화가 토지츠키 하지메의 ‘나와 그녀와 시리즈’가 애니북스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토지츠키 하지메는 이 시리즈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현대지능개발사나 삼양출판사의 ‘야오이’로 한국독자들을 만나던 작가로 “불연속 세계”나 “센과 이치 이야기”같은 작품들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다. “나와 그녀의 시리즈”는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권이 여기에 소개하는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다. 두 번째 권인 “나와 그녀와 선배의 이야기” 역시 애니북스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어 있다.(아예 ‘나와 그녀와 시리즈’로 2권을 묶어서 출시한 세트상품도 나와 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스토리의 연계성도 있고, 중복되는 캐릭터도 두 권에 걸쳐 모두 등장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완전히 다른 별개의 작품이며, 두 작품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시간(또는 연대)’의 문제다. 첫 번째 권인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가 주인공 중 하나인 스즈키 선생의 ‘현재’ 편이라면, 두 번째 권인 “나와 그녀와 선배의 이야기”는 스즈키 선생의 ‘과거’ 편이라고 할 수 있다.(두 번째 권인 “나와 그녀와 선배의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도 중에는 절대 말을 하면 안 된다?”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는 “백귀야행”이나 “세상이 가르쳐준 비밀” 같은 “환상기담”의 형태를 띤 판타지이자 음습하고 오싹한 여운을 남기는 호러장르의 매력을 갖춘 작품이기도 하다. 잔잔하고 담백한 연출 속에 섬뜩한 이야기를 숨겨놓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작가의 극적 구성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세상(인간들이 사는 현실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들’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불러내어 자신이 갈망하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 민속학자 스즈키 선생의 신비롭고 무서운 행적들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스토리다. “벌레는 죽은 자의 생각을 전해줄 수 있지. 그 반대도 가능하고, 이쪽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초대해서 대접을 하고 보내는 거야. 벌레를 보낸다고는 하지만 전국 각지에 있는 ‘벌레 보내기’축제와는 달라, 이 요바나시(夜?, 동지 즈음에서 입춘 무렵까지 해가 진 뒤에 이루어지는 다도모임을 이르는 말)는 신성한 행사다. 말없이 치러지는 신성한 의식이지.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도 많아진다. 이를테면 그런 거지.” 이 작품은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내용은 ‘벌레’를 한밤중의 다도회에 초대해 저승으로의 전갈을 부탁하는 이야기로 작품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나’와 ‘그녀’와 ‘선생님’이 모두 등장하는, ‘이야기의 시작’을 상징하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들 중 작품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생’역의 민속학자 스즈키 선생은 “죽은 누나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무시무시한 목적을 이루려는 일종의 ‘주술사’다. 민속학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의 제령행사나 민속신앙이 주가 되는 축제 등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사례들을 연구하고, 필요하다면 설령 그것이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집하고야 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남자다. 전체적인 에피소드에서 ‘화자(話者)’역할을 맡고 있는 ‘나’역의 켄신은 다도를 가르치는 타카하시 가문의 후계자지만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전혀 없고 현재는 편의점에서 알바나 하면서 설렁설렁 지내고 있는 청년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벌레와의 다도회에서 스즈키 선생의 ‘일’과 엮인 후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건에 계속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그녀’역에 해당하는 여고생 코마치는 스즈키 선생이 ‘다시 살려내기 위해’ 모든 열과 성을 다하는 대상인 ‘누나’의 딸로, 쉽게 얘기하면 ‘선생’과 ‘그녀’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다. ‘액받이 무녀’였던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아주 강한 영력이 있으며 외삼촌과는 애증의 관계, 켄신과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야기의 중심에서 활약한다. “하나만 말해두겠는데 그 남자한테 무턱대고 물건을 받아서는 안 돼. 당신의 그 나쁜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남자는 하고 있거든, 확 잡아먹혀도 난 모르니까!” ‘두 번째 이야기’는 작품의 호러적인 느낌을 점차 가중시키는 에피소드로 ‘소원을 들어주는 타타리가미(?神: 재앙신의 일종)’가 봉인된 상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릴 적 할머니들이 여름밤에 들려주시던 무서운 이야기 같은 느낌의 음산하고 오싹한 에피소드다. 켄신과 코마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엮어주는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엄마는 꼭 되돌아 올 거야, 엄마는 죽긴 했지만 곧 돌아 올 거다. 하지만 좀 더 기다려야 해, 아직 절반뿐이라 만날 수 없단다.” ‘세 번째 이야기’는 스즈키 선생의 ‘목적’에 담긴 사연을 설명해주는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작품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의식의 수호신’인 ‘여우’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에피소드다. 코마치 집안이 대대로 어떤 역할을 맡아 세상을 살아왔는가, 스즈키 선생이 누나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선생님은 언제나 죽은 이의 곁으로 가는 길을 찾고 계셨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이어져 있는 에피소드다. 드디어 저승으로 가는 문을 열어 누나의 영혼을 찾으러 떠난 스즈키 선생과 이를 저지하려는 코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승으로 들어간 켄신의 이야기가 총 2화에 걸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유려하게 펼쳐진다. 마지막의 결론에서 담담하고 애잔하게 표현되는 주인공들의 쓸쓸한 정서는 이 작품이 그저 단순한 ‘환상기담’이나 ‘무섭고 기괴한 이야기’ 수준에 머물지 않을 거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으로 ‘순정만화’의 정서와 ‘공포영화’의 정서가 아주 적절하게 뒤섞인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