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교텐 하루히코는 도립 마호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동급생이었다. 3년 간 같은 반이었지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교텐과 친한 녀석 따윈 아무도 없었다. 교텐이 언제나 한 마디도 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 번, 딱 한 번 교텐의 목소리를 들...
2012-08-30
김진수
“교텐 하루히코는 도립 마호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동급생이었다. 3년 간 같은 반이었지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교텐과 친한 녀석 따윈 아무도 없었다. 교텐이 언제나 한 마디도 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 번, 딱 한 번 교텐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후 가장 참신한 작가”라고 불리는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시온의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이 “집 구하세요?”의 작가 야마다 유기에 의해 만화로 각색되어 한국의 독자들을 찾아왔다. “너 내년에는 분명히 바빠질 거다.” 소설을 만화로 옮기는 작업은 장르적인 연관성 면에서 볼 때는 쉬운 작업일 것이고 장르적인 특성 면에서 볼 때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소설이 ‘글로 묘사된 이야기’라는 측면으로 볼 때 ‘글과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인 만화로 바뀌는 것은 ‘이미 모든 구성요소가 갖춰진 이야기’에 ‘그림’이라는 일종의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용이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만이 주는 미묘한 느낌이나 상상력 같은 정서적인 측면을 비교해 볼 때 만화와 소설은 아예 다른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림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인물이나 풍경은 기존의 소설에 ‘고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게 됨으로써 상상력을 제한하고, 글로만 읽었을 때의 여운이나 감동이 시각적으로 표현됨과 동시에, ‘글로 읽었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소설이 만화로 바뀌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다는 것은, 그 결과물의 성공여부나 만족도를 떠나, 독자에게는 즐겁고 뿌듯한 일이 된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방안에 나 말고 다른 생물의 기척이 있는 건 오랜만이다...” 원작자인 미우라 시온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 아웃사이더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을 담은 작품으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소설가다. 1976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로 데뷔했다. 유명한 고대문학 연구자인 아버지 미우라 스케유키 덕에 어렸을 때부터 책에 파묻혀 산 미우라 시온은 방대한 독서량과 왕성한 상상력으로 “월어(月魚)”, “백사도”, “비밀의 화원”,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옛날이야기” 등 잇달아 화제작을 발표했다. 2006년에는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으로 제135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는 “꿈같은 행복”, “망상작렬”, “취미가 아냐”, “인생극장”, “시온의 책갈피”등이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만화가인 야마다 유기는 삿포로 출신으로 작품으로는 만화 “냉장고 속은 비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 “난 나쁘지 않아”, “꿈이 이루어지는 12월”, “잔인하기에 존재한다” 등이 있으며 주로 야오이 장르를 다룬 다수의 작품들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다. “한 번 몸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꿰매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열을 쬐어도 온도가 낮은 부위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의 만화 각색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다. 소설의 장점과 만화의 장점이 아주 잘 융합된 수작(秀作)으로 현재(2012.07) 한국어판으로는 2권까지 밖에 발행되지 않아서 얼른 다음 권이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주인공 다다와 교텐의 이미지가, 마치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한 마디로 기가 막히게 잘 표현되어 있다. 야오이 장르에서 탁월한 감각을 선보였던 야마다 유기의 각색이라 그런지 몰라도, 다다와 교텐의 그 어색하면서도 미묘하게 친밀한 관계가 ‘만화만이 묘사할 수 있는 은은한 여운’을 풍기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그 사람의 본질은 대충 첫인상과 별로 다르지 않아, 친해지면 그만큼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사람은 말과 태도로 얼마든지 자신을 가장할 수 있는 생물이니까."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의 강점은 착착 감기는 ‘대사’에 있다. 원래 소설이었던 것을 만화의 대사로 옮겨놓은 것이어서 그런지, 읽다가 쉽게 지나치고 금방 잊어버릴만한 그렇고 그런 수준의 가벼운 대사가 아니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은근히 느껴지는 가운데 인생의 진리 한 자락이 묵직하게 담겨있는, 그런 ‘폼 나는 대사’들이 컷과 컷 사이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시기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누군가가 필요로 해준다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뜻이야.”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의 매력은, 소외된 자들의 외로움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따뜻함을 부각시키는데 있다.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다다에게 의뢰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소소한 사연은, 언뜻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시시한 일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던 ‘작지만 소중한 것’을 묵직하게 깨우쳐주는 느낌이다. “깨끗한 폐를 연기로 더럽혀라, 소년. 그게 인생이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은 원작이 되는 한 권짜리 소설(들녘)도 한국어판으로 나와 있고, 마츠다 류헤이와 에이타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로도 나와 있다. 만화를 보신 후에 소설이나 영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미우라 시온의 원작을 만화로 각색한 또 다른 작품인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전 6권으로 서울문화사를 통해 출간, 소설은 2권짜리로 북폴리오를 통해 출간, 영화로도 나와 있다)도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으니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미우라 시온의 담담하지만 맛깔스러운 문장과 야마다 유기의 잔잔하고 쓸쓸한 여운이 공존하고 있는 수작(秀作),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을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