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귀족
“물이 없으면 우유를 마시면 될 텐데” 스퀘어 에닉스의 만화잡지 ‘월간 소년 간간’에 연재한 “강철의 연금술사”가 첫 연재작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자, 작가인 아라카와 히로무는 하루아침에 일본만화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올랐다. ...
2012-08-27
석재정
“물이 없으면 우유를 마시면 될 텐데” 스퀘어 에닉스의 만화잡지 ‘월간 소년 간간’에 연재한 “강철의 연금술사”가 첫 연재작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자, 작가인 아라카와 히로무는 하루아침에 일본만화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올랐다. 나도 물론 “강철의 연금술사”(전 27권, 한국어판은 학산문화사를 통해 발행되었다)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고, 신인 작가가 그린 것치고는 너무나 매끄럽고 촘촘하게 짜인 작품의 밀도에 감탄했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이런 ‘소년만화의 정석’같은 그림체와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백성귀족” 1권의 표지에 소개되어있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1973년 홋카이도 출신, 고교 졸업 후 7년 동안 가업인 낙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여러 잡지에 일러스트와 4컷 만화를 투고한 끝에 1999년 ‘제9회 에닉스 21세기 만화대상’ 수상을 계기로 상경하여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2001년 스퀘어 에닉스의 ‘월간 소년 간간’에서 첫 연재작이자 대표작인 ‘강철의 연금술사’를 연재 개시,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일약 21세기 일본 만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여성 만화가 특유의 섬세함과 웬만한 남성 만화가를 능가하는 호쾌함, 그리고 그 와중에 허를 찌르듯 번득이는 유머 감각을 골고루 겸비한 작품으로 평판이 높으며, 2011년 현재에는 ‘강철의 연금술사’와 ‘수신연무’의 연재를 나란히 끝마치고 차기작을 준비하는 한편 농가 에세이 ‘백성귀족’을 틈틈이 집필 중, 대표작으로는 ‘강철의 연금술사’, ‘수신연무’, ‘백성귀족’ 등이 있다.” 그렇다. 위의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라카와 히로무의 특징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남성적인 호쾌함, 허를 찌르듯 번득이는 유머 감각을 골고루 겸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신연무”는 기대에 많이 못 미쳤지만 말이다.) 특히 아라카와 히로무의 ‘유머 감각’은 “강철의 연금술사” 보너스 4컷 만화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곤 했는데, 작가 자신의 희화화된 캐릭터이기도 한 ‘소 여사님’이 그리웠던 분들이라면 너무나도 좋아할만한 책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세미콜론에서 출간한 “백성귀족”이다. “현재 우리 일본의 식량 자급률은 불과 40%!! 자국민의 절반도 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이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없다! 한편 그러한 와중에서도 일본의 식량 창고, 홋카이도(北海道)지방에는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기 위해 매일 같이 흙을 뒤집어쓰며 땀 흘려 일하는 한 명의 만화가가 있었다!! 그 이름 하여 농민, 아라카와 히로무!!!” ‘월간 wings’에 연재하는 “백성 귀족”은 아라카와 히로무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 홋카이도를 무대로 “농가의 실태”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진짜배기 농가 에세이’다. 작가 본인이 농업 고교를 졸업하고 7년간 가업인 낙농업에 실제 종사했었던 경험과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고향에 대한 추억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농가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 황당한 에피소드와 ‘농업의 실체’에 관한 유용한 정보가 적절하게 뒤섞인 ‘품질 좋은 개그만화’라 하겠다. “농가의 상식은 사회의 비상식” “백성귀족”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작업 중에 야생 곰이 출몰한다거나, 도축장에 끌려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소의 이야기라던가, 태연한 얼굴로 감자를 10톤이나 훔쳐간 간 큰 도둑들의 이야기라던가, 지상최강의 야채도둑이 줄무늬 다람쥐라던가 하는, 무척이나 황당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작가 특유의 개그코드를 통해 만화로 각색되어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다. “아라카와 일가의 가훈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지어다.’ 입니다만, 그것은 물론 동물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개는 애완용이라기보다 경비용, 고양이는 쥐를 잡는 용도로 기르는 것이지요.” “백성귀족”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이 “홋카이도의 농가”라는 아주 특색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재미있는 개그 만화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농가(또는 농업)의 실태’는 낄낄거리고 웃어넘기며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들이 많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우유 내다 버려” 사건이라던가, 최대의 식량생산지인 홋카이도를 빼면 40%이던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20%정도로 축소된다던가(참고로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6.9%), 가축은 ‘상품’으로 키워지지만 분명히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라던가 등등 우리가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으로서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이야기 중간 중간에 인상적으로 배치되어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길, 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 역시 ‘업(業)’이라 했다. 하지만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므로, 음식을 먹을 때 욕심을 피우지 말고, 나를 위해 사라져간 다른 생명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폭식(暴食)’은 7가지 죄악 중 하나로 정해놓고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자연이라는 거대하고 잔인한 환경에 맞서서 피땀 어린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먹거리’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죽기 싫으면 밭을 일궈!! 가축을 키워!! 아니면 홋카이도로 이주해서 농업에 투신하던가!!” 현재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출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재미와 유용성 면에서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은 만화다.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읽어두면 무척이나 좋을 것 같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홋카이도 농가의 모습이 우리나라 농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잊지 말자.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