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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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에마논

“1967년 제미니 계획이 일단락되어 아폴로가 달로 향하려던 시절, 아폴로 1화가 우주개발 사상 최초의 사망자를 내면서 달은 또 다시 멀어졌다. 베트남 전쟁에 50만 명의 미군이 투입된 해, 하인라인이 60세란 나이로 네 번째 휴고상을 수상한 해, 스펙터가 아소산 화구...

2012-08-16 김진수
“1967년 제미니 계획이 일단락되어 아폴로가 달로 향하려던 시절, 아폴로 1화가 우주개발 사상 최초의 사망자를 내면서 달은 또 다시 멀어졌다. 베트남 전쟁에 50만 명의 미군이 투입된 해, 하인라인이 60세란 나이로 네 번째 휴고상을 수상한 해, 스펙터가 아소산 화구를 요새화하고 우주인과 괴수가 컬러TV에서 날뛰고 어디를 가도 ‘돌아온 주정뱅이(더 포크 크루세이더(The Folk Crusaders)라는 일본 그룹의 대표곡)’가 흘러 나왔던 시절, 폴이 ‘서전트 페퍼’를 쓰고 있던 시절, 그리고 늘 무사안일하게 지냈던 학생시절, SF와 실연에 여념이 없었을 무렵 나는 그 불량소녀와 만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지도를 지녔다는 SF소설가 카지오 신지의 동명 소설을 츠루타 겐지가 만화로 각색한 “추억의 에마논”이 대원씨아이의 프리미엄 코믹스 브랜드 ‘미우’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작가 후기에서 원작의 팬임을 밝히고 있는 츠루타 겐지는 1986년에 데뷔한, 경이로운 질감의 작화실력을 자랑하는 작가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내놓은 만화는 몇 권되지 않는, 팬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안타까운 작가이기도 하다. 전설의 SF만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표작 “스피릿 오브 원더”와 독특한 느낌의 추리물 “포겟 미 낫”이 2012년에 세미콜론을 통해서 한국어판으로 정식 출간되었고, 여기에 소개하는 “추억의 에마논”까지 합하면 프로작가로 활동한 26년의 세월동안 총 세 권의 단행본이 출간된 셈이니 이정도면 그의 팬들이 비꼬듯 얘기하는 ‘게으른 천재’ 소리를 들어도 별로 할 말 없는 작가일 것이다. (물론 그의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고나면 ‘게으른 천재’라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게 되지만, 활동기간에 비해 워낙 작품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작가로서 츠루타 겐지의 프로필은 지극히 간단한데, 국내에 소개된 세 권의 작품과 국내에는 미발간된 작품 한 권 외에는 화보집 두 권이 전부인걸 보면 일본에서의 활동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스토리 하나 짜는데 반년쯤 걸린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만화보다는 주로 소설의 삽화나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적으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스피릿 오브 원더” 한국어판에 실린 츠루타 겐지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사진가를 목표로 대학시절엔 사진공학을 전공했지만, 재학 중 만화가 지망으로 전환, 동인지 활동을 거쳐, 1986년에 주간 코믹 ‘모닝’에 게재된 제 15회 치바 테츠야상 입선작 ‘이 얼마나 광활하고 근사한 우주인가’로 데뷔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소설의 삽화작업도 많이 하여, 제 31회(2000년), 제 32회(2001년) 성운상 아트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Spirit of wonder’, ‘아베노마시 마법☆상점가’, ‘Forget-me-not’, ‘추억의 에마논’, 화집 ‘수소’, ‘코밋(Comet)’등이 있다.” “나의 학생시절, 당시 미 ? 일 안보조약의 기한 연장을 둘러싸고 대학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사안일하게도 SF에 푹 빠져서 태평스런 나날을 보냈다. 그렇다고 SF에만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넘쳐나는 학생이란 신분이었기 때문인지 당시의 나는 걸핏하면 여자들에게 반했다. 쉽게 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내 자존심은 1타스 이상이나 짓밟혔다. 그래도 사춘기란 사고형태도 행동형태도 미숙하고 풋풋한 시기라서 직정경행(直情徑行, 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냄, 예법에 개의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함) 기질의 난 질리지도 않고 반했다 차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 때도 나는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실연 후 너덜너덜해진 가슴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상실의 여행’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알바비를 고스란히 들고 낯선 땅을 무작정 정처 없이 떠돌다... 슬슬 주머니 사정이 걱정되자 집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원작자인 카지오 신지는 1947년생의 소설가로 1971년 소설 ‘미아(美亞)에게 보내는 진주(美?に贈る?珠)’로 데뷔한 후 수많은 걸작을 내놓은 일본을 대표하는 SF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환생”이라는 영화의 원작으로 유명한 소설 “부활”이 출간되어있다) 단편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지구는 플레인 요구르트’(성운상 수상), ‘미지의 혹성 키-라-고’, ‘샐러맨더 섬멸’(일본SF문학상 수상) 등이 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쇼와 25년(1950년), 그러니까 지금 17살이야, 하지만 이건 내 육체연령에 불과해, 내 정신연령은...아마 30억년 정도는 되는 것 같아. 겉보기에는 17살이지만...” “추억의 에마논”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너무 빤한~’ 홍보문구가 있다. “인기절정 SF소설의 전격 만화화! 설레는 원작의 상상력과 매력적인 필력의 만남! 상상력과 감수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최고의 몰입도를 선사하는 명작!!”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표지의 또 다른 문구 때문이었다. “30억년의 추억을 만나다!! 영겁의 세월...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모든 생명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소녀, 에마논, 인류를 초월하는 존재로서 지구의 감성과 진화를 지키며 30억년 넘게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세상에...“30억년의 추억”이라니...이 엄청난 스케일의 상상력이 궁금해서 난 주저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고, 비록 원작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스피릿 오브 원더”에서 보여준 츠루타 겐지의 필력을 믿고 망설임 없이 결제했다. “인간에게는 30억년의 추억이 너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지쳐버렸어.” 이 책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단편 소설이 원작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규슈까지 가는 여객선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주인공의 17시간동안의 배여행이 전반부, 13년 후 전철역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남녀주인공의 짧은 재회가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모든 생명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소녀”가 이 이야기의 핵심설정이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과학적인 상상력’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작품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가며 서서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특히 여자 주인공의 딸과 남자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느껴지는, 마지막 부분에서의 잔잔한 감동은 정말 압권이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난 네가 좋아,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라는 소녀의 말이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하게, 오랫동안 남아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