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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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흔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멀어져 가고, 주영이도 멀어져 가고, 나 혼자 남은 이 구도, 여기에 ‘나의 학창시절’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유시진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6년여만의 신작’이라고 책 띠지에 써있는 걸 보면 꽤나 오랜 시간이...

2012-07-20 유호연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멀어져 가고, 주영이도 멀어져 가고, 나 혼자 남은 이 구도, 여기에 ‘나의 학창시절’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유시진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6년여만의 신작’이라고 책 띠지에 써있는 걸 보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의 제목은 “월흔(月痕)”으로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달 월(月)’자에 ‘흉터 흔(痕)’자를 썼으니, ‘달의 흉터’, ‘달의 흔적’, ‘달의 자취’, ‘달의 발뒤꿈치’ 등의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겠지만, 사전에 나와 있는 바로는 “거의 사라져 가는 새벽녘의 달그림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 꿈은 고통일 뿐이야. 너를 위해서 얘기하는 거야.” 자신만의 확실한 색깔, 자신만의 굳건한 세계,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의 충성도 등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한국의 만화가 중에서는 아마 유시진이 1등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작품의 대중성, 선호도, 다양성, 상업성 등의 기준으로 접근해보면 유시진이 만들어낸 세계는 철저하게 소수의 마니아, 세상에서 소외된 주인공, 철학적인 난해함, 어두운 분위기, 섬세한 심리묘사 등의 키워드로 분석될 것이다.(이것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시진이 만들어낸 세계는 유시진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닫혀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유시진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폐쇄자(closer)”에 등장하는 세계처럼 기존의 일반적인 세계와는 확실하게 분리된 세계,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AT 필드’같은 강력한 방어막으로 둘러쳐져 완전히 폐쇄된 다른 차원의 세계 같다. (이것도 개인적인 생각이다) 독자들의 호불호가 이렇게 명확하고, 독자들의 선호도가 이렇게 극단적인 작가도 흔치는 않은데 아무튼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굳이 ‘유시진 월드’를 정의 내려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강력한 진입장벽만 넘어선다면 확실한 공감대를 선사하는 유니크한 세계’, 이것이 ‘유시진 월드’의 매력이라고 난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소개하는 첫머리에 ‘유시진님의 작품은 가볍게 즐기기엔 뭔가 심오한 철학과 몽환적인 분위기...그리고 판타지가 있어서 유시진님의 작품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반응이 안 좋기 때문에 쉽게 추천할 수가 없다.’라고 써놓았던데 이야말로 유시진에 대한, 이 작품에 대한 아주 ‘적절한’ 소개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사실을 외면하는 건, 진실을 지키는 길이 아니야.” 어쨌든 유시진만의 독특한 세계를 다시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만화 애호가로서 아주 반갑고 기쁜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유시진의 신작 “월흔(月痕)”은 ‘디지털 전용 순정만화잡지 민트’에 연재되고 있는 작품으로 ‘홀드’라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소녀 ‘이든’을 주인공으로 한 SF판타지라 할 수 있다. “난 점 같은 것도 안 보고, 팔자라는 단어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그건 그런 게 있다는 걸 안 믿어서라기보다, 그걸 말하고 듣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지, 불순물이 너무 많아지니까” 주인공인 ‘류이든’은 고3 여학생, 그녀의 특이한 능력은 ‘자신이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관계를 맺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주는 능력’이다. 이든은 이 능력을 ‘홀드’라고 부르며 일정주기로 ‘관계를 맺을 자’를 선별하여 다가가 자신이 ‘열쇠’라고 부르는 것을 찾을 때까지 어떤 때는 친구로 어떤 때는 연인으로 관계를 맺는다. 작품의 처음은 이든이가 윤명진이라는 동급생과 ‘홀드’를 통해 ‘친구’가 된 이후 둘 사이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에피소드 0 : 꼬리 밟기’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앞으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세계의 모습과 그 곳의 법칙, 그 세계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유시진의 스타일대로 확실하게 보여 지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유시진이 구상한 어떤 ‘치밀하고 일정한 법칙’에 의해 잘 엮어져 있는 이 첫 번째 에피소드를 집중해서 끝까지만 읽는다면 이 작품에 대한 확실한 길잡이가 될 수 있으며, 영화 ‘식스센스’처럼 독특한 반전코드도 숨겨져 있어서 이야기의 끝에 가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여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타고난 운명이라는 건 있어, 때로는...그 본인의 의지 자체가, 타고난 운명이기도 하고, 그걸 남이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난 말이야, 연예인들 중에 어릴 때 평범하거나 심지어 못생겼던 사람들이 십여 년 후 엄청 미인이 돼 있는걸 보면...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 사람의 그 강력한 집념이 그런 식으로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게 우선 재밌더라고” 현재 2권까지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이 작품은 유시진 팬들이 보기엔 너무나 기쁘게 환영할만한 ‘왕의 귀환’이고, 유시진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독특해서 아주 신선하거나 뭐라고 하는 건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아주 재미없거나’로 둘 중 하나의 반응이 올 작품이다.(오죽하면 띠지에 ‘그야말로 유시진표 만화!!’라고 큼지막하게 써놨겠나) 인터넷상에 올라온 “월흔(月痕)”에 대한 평들도 역시나 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올라오고 있는데 유시진의 열혈 팬으로 보이는 어떤 이는 이 작품을 ‘유시진 특유의 색을 일반인 또는 초심자를 위해 그 농도를 조금 낮춰서 접근성을 높인 책’이라고 평했고, 또 예전의 팬으로 보이는 어떤 이는 이 작품을 ‘기대보단 별로고 점점 몰입하기 힘들어진다. 유시진의 책이기 때문에 의무감에 읽은 탓일까...판타지와 내면심리를 잘 버무렸지만 만화로서의 특별한 재미는 느끼진 못했다...데뷔작부터 보아 온 오랜 팬으로서 저자의 만화에 점점 실망하게 되어 가슴 아프다. 지금은 저자가 저자 자신을 위한 만화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론 유시진의 작품은 읽지 않게 될 것 같다.’라는 슬픈 평을 남기기도 했다. 유시진의 장점이자 단점은 앞서도 말했듯이 ‘초기의 진입장벽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다. 유시진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 경계를 넘기가 아주 어려운데, 초기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런 폐쇄적인 느낌의 작풍을 일관되게 유지해오고 있고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의 영역에 해당하는 이러한 ‘특성’을 독자가 침범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읽어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작가가 침범할 수 없는 독자의 영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