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소나타
“내 이름은 혼다 료코, 나이는 50세, 쉰 살에도 봄은 온다.” “치하야후루”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스에츠구 유키의 단편집 “봄의 소나타”는 2007년도에 고단샤를 통해 출간된 작품으로 “봄의 소나타”, “반지의 짝사랑”, “아름다운 식당”, “일곱 ...
2012-07-06
김진수
“내 이름은 혼다 료코, 나이는 50세, 쉰 살에도 봄은 온다.” “치하야후루”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스에츠구 유키의 단편집 “봄의 소나타”는 2007년도에 고단샤를 통해 출간된 작품으로 “봄의 소나타”, “반지의 짝사랑”, “아름다운 식당”, “일곱 가지 약속”이라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끄럼쟁이 노도카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애한테 내가, 뭔가 해줄 수 없을까?” 스에츠구 유키의 만화 중에 내가 가장 처음에 본 것은 “쿠베르튀르”라는 작품이었다. 꽃미남 형제가 경영하는 초콜릿 전문점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계절별로 모은 단편집 같은 느낌의 작품이었는데, 청춘남녀의 ‘애정행각’에만 포커스를 맞춘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잊고 있던 자아를 다시 찾게 되는 할머니, 짝사랑의 실패를 통해 성숙해지는 여중생, 야구팀의 코치누나가 첫사랑이 되어버린 아홉 살 소년의 노력 같은 다양한 ‘사랑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고 아름답게 표현해낸 다채로움이 무척 인상 깊었다. “쿠베르튀르”라는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후, 스에츠구 유키라는 작가에게 관심이 생긴 나는 곧바로 이 작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치하야후루”를 읽었고 아주 높은 만족감을 느꼈다. 현재 한국어판으로 15권까지 출간되어 있는 이 작품은 “카루타”라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일본의 카드게임을 소재로 만든 “청춘만화”로, 마치 “슬램덩크”와 “H2”가 순정만화라는 형태를 빌어 절묘하게 합체된 것 같은 느낌의, 매우 독특한 순정만화였다. “쿠베르튀르”라는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일반적인 순정만화라 하기엔 너무 이질적이었고, 일반적인 스포츠만화라고 하기엔 순정만화의 색채가 너무 강했다. “나도 가족이 되고 싶단 말이야....” 위의 두 작품을 읽고 내가 낸 결론은 한 가지였다. “이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나와 파장이 맞는 구나”,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나온 것이 또 없는지 다시 찾아보았다. 그래서 발견한 작품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봄의 소나타”다. 어찌 보면 가장 최근작으로 시작해서, 대표작을 거쳐, 초기작까지 오게 된 경우인데, 이 작품이 스에츠구 유키의 데뷔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출간 연도를 보니 어쨌든 가장 오래된 작품임엔 틀림없는 것 같고, 이 세 작품 외엔 아직 한국에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 것도 없는 것 같다. “결혼은, 무서워. 마유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짝반짝하고 아름답기만 하진 않아, 그래도, 다시 한 번 누군가를 믿는다면 당신이 좋아, 나는, 당신이 좋아.” “쿠베르튀르”라는 최근작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어떤 다채로운 감정들’ 때문에 “치하야후루”를 읽게 되었고, 거기에서 이 작가의 개성을 ‘확실히’ 알게 되면서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아 “봄의 소나타”까지 읽게 된 것이다. 초기작인 “봄의 소나타”를 읽으면서 다행스럽다 느꼈던 것은 이 작가의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여러 가지 색깔들’이 변함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었다. 최근작인 “쿠베르튀르”와 초기작인 “봄의 소나타”는 이야기의 느낌이나 에피소드 구성형태, 드라마의 연출방식 같은 것이 상당히 유사한데, 결론적으로 이 작가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색깔’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감성이 확실하다고 느껴졌고, 그래서 더더욱 이 작가가 좋아졌다. “이제 그만, 흔들리지 않는 바닥이 필요해.” 스에츠구 유키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여러 가지 색깔 중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푸근한 시선과 섬세하고 잔잔하게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력이었다. “봄의 소나타”는 이런 작가의 색깔이 아주 잘 표현된, 완성도 높은 4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봄의 소나타”는 활발하고 오지랖 넓은 50대 아주머니와 소심하고 얌전한 20대 아가씨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적으로 서로 끌리는 남녀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뜻한다.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이 에피소드의 내용을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 속에 강렬한 반전과 먹먹한 감동, 양쪽 모두를 심어놓은 아주 잘 만들어진 단편이다. 두 번째 단편 “반지의 짝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꿈꾸고 있는 30대 직장여성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녀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한 번 결혼에 실패한(그것도 아내의 외도로 인해 큰 상처를 받은) 이혼남이라는 것, 한 번 실패한 경험을 가진 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결혼까지 나아가려 하지 않고, 그런 남자가 답답하고 야속한 여자는 ‘가족이 되길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상처를 받는다. 둘 사이에 생긴 감정의 깊은 골을 뛰어넘어 결혼이라는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남녀의 이야기가 두 번째 단편 “반지의 짝사랑”이다. 세 번째 단편 “아름다운 식당”은, 예전엔 손님들로 매우 북적거렸으나 지금은 거의 망해버린 정식집 ‘류가사키 식당’을 무대로 펼쳐지는 예쁜 사랑이야기이자, 한 여자의 ‘자아 찾기’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다. 사실 ‘사랑’과 ‘자아 찾기’는 단편에서 쉽게 섞일만한 소재가 아니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결론이 어느 한 쪽에 반드시 치우치기 마련이라 ‘중용’의 묘를 잘 살리지 못하면 굉장히 어설픈 결론이 날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뒤섞이면서 훈훈하고 행복한 느낌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모습이 아주 좋았다. 네 번째 단편 “일곱 가지 약속”은, 개인적으로 가장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은 에피소드였는데, 아빠를 잃고 엄마와 둘이 사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만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웃음을 잃어버리고 지쳐버린 엄마에게,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한 어린 딸의 여러 가지 노력이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 속에서 애틋하게 펼쳐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소한 행복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단편이었다. 스에츠구 유키만의 ‘행복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단편집 “봄의 소나타”를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