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주인
“당신이 책을 고르는 게 아냐. 책이 당신을 선택한 거지.” 춥고 매서운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고 외로운 연말연시, 술에 잔뜩 취해 괴로워하며 집에 돌아가던 샐러리맨 한 명이 우연히 불 켜진 도서관 하나를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늦은 시간이건만, 차가운 바람이...
2012-07-04
석재정
“당신이 책을 고르는 게 아냐. 책이 당신을 선택한 거지.” 춥고 매서운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고 외로운 연말연시, 술에 잔뜩 취해 괴로워하며 집에 돌아가던 샐러리맨 한 명이 우연히 불 켜진 도서관 하나를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늦은 시간이건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밖에 비해 도서관 안은 따뜻했고 책들이 가득 꽂혀진 책장들이 늘어선 풍경은 지쳐 있던 남자에게 왠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 때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 사서 하나가 다가와 냉정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꺼져, 술 냄새나! 아마 잔뜩 취해서 저쪽 공원에서 구토나 하다 이곳을 발견했겠지, 여기는 주정뱅이가 쉬는 장소가 아니야. 빨리 집에 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이름의 일본만화가 시노하라 우미하루의 “도서관의 주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읽어야 할 책을 지정해준다는 건 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책’으로 생각하게 만들거든, 이 막대한 책 속에서 자기만의 한 권을 발견하는 것, 완전히 보물찾기잖아, 그 즐거움을 빼앗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 책의 주인공인 미코시바는 사설도서관인 ‘타치아오이 어린이도서관’에 사서(司書)로 근무하고 있는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남자다. 커다란 뿔테안경에 버섯머리를 한 이 청년은 불친절해 보이는 말투나 외모와 달리 사실은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자신의 일에 있어 매우 높은 프라이드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전문가다. 전공은 아동서이지만 다른 장르를 다루는 업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프로페셔널 사서이자 독자가 원하는 책을 적절하게 추천하는 업무에 있어서는 가히 스페셜리스트의 경지에 올라있다. 이 작품의 매력이자 뼈대는 이 주인공의 ‘확고함’에서 비롯되는데,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이상이라고 할 만큼 작품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 하겠다. (한국어판의 제목이 “도서관의 주인”인데, 영어제목이 “Master in library”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인공인 도서관의 사서 미코시바를 지칭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나침반 같은 것으로 남이 구하는 책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뿐이야, 가리킨 그 끝에 보물이 있을지 없을지는 가본 녀석만 아는 거지.” 책의 구성은 아주 간단하다. 매 에피소드마다 사연이 있는 인물이 도서관의 손님으로 등장하고 그는(또는 그녀는)무언가 고민에 빠져 있다. 그 때 미코시바의 안내나 추천을 통해 ‘책 한 권’을 추천받아 읽게 된다. 그 책을 읽고 무언가 깨닫거나 해소된 손님이 행복과 평안을 찾는다. 궁지에 몰리거나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치유해줄 수 있는 책 한 권’을 추천해 주는 남자가 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매 에피소드가 이런 식으로 되풀이되는 동안 등장인물들도 점점 늘어가면서 내용의 풍성함이 서서히 쌓여가는 방식이다. 아주 정통적인 일본만화 방식으로 만들어진 ‘치유계 스토리’라 할 수 있다. 추천된 책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에피소드 중간에 그림동화처럼 삽입되어 있어 그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감정이입하기가 쉽고, 무엇보다 작가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명확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읽는 이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아주 좋다. “아저씨가 말하는 건 도서관이 아니에요. 그냥 책이 들어 있는 상자야!” 서점에 가보면 만화던 소설이던 동화던 실용서던 간에 장르에 상관없이 책 표지나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드는 책들이 가끔 있다. 그런 책들은 내용이나 필요에 관계없이 사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서 나로 하여금 무척이나 고민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 디자인에 있어 대단한 심미안이 있다는 건 아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좋아하는 존재인 ‘책’이라는 것에 대한 나만의 취향과 나만의 수집 욕구가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는’ 흔치않은 경우인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나’의 경우다. 나에게 있어 ‘책’이란 물건이나 상품이 아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책장에 꽂힌 책이 아름답다고 느꼈었고, 햇빛이 좋거나 바람이 시원한 날에는 도서관 창가에 앉아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나 평상시에는 닫혀있는 아버지의 서재 창문을 열고 그 안에서 낮잠을 자는 것을 즐겼다. (물론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날씨에 상관없이 그 순간만의 풍류가 있었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책의 특성상 날씨가 습하던 날은 다른 날보다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된 지금 그랬던 어린 시절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책을 읽는 것보다는 책이 가득 꽂혀져 있는 책장이 있는 풍경을, 그 미묘한 향기를, 조용하지만 무언가 풍성한 느낌을 주는 그 분위기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난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독서도 많이 했고, 그것이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어 지금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직접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경험의 범위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책이란 것은 지혜나 정보뿐만 아니라 ‘메시지’까지도 담고 있는 인생의 가장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사서라는 건 도서관의 눈이야.” 앞서 얘기한 것처럼, 디자인이나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는 경우도 사실 흔치는 않지만, 정말 흔치 않은 경우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 내용까지 너무 마음에 드는 경우인 것 같다.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나에게 엄청난 희열과 만족감을 주게 되는데, 위에 인용한 ‘책이 당신을 선택한다.’라는 문구처럼, ‘일상 속의 작은 마법’ 같은 일이 우연히 벌어진 것 같은 행복한 느낌에 빠져들곤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만화 “도서관의 주인”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 작품이다. 책의 표지디자인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내용에 상관없이 바로 사버렸는데, 집에 와서 읽었더니 웬걸, 내용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느꼈고 이렇게 다른 독자들에게 소개까지 하게 되어 기쁘다. 아직 한국어판으로는 1권밖에 나오질 않았지만, 힘들고 지친 어른들도, 한참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도, 글자를 배워 책을 막 읽기 시작한 어린이들도 연령 구분 없이 많은 분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아주 유익하고 따뜻한, 치유의 기운을 주는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