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난생 처음 주운 고양이는 까만 고양이였다. 주운 곳은 저녁놀 발갛게 진 공장 외딴 공터.... 3일 만에 고양이가 죽었다. 두근두근 했다. 처음 죽인 고양이, 처음 생긴 친구들과 공장 한 귀퉁이에서 치른 장례식.”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일본 만화가 사이바라 리에코는 1964년 11월 1일 고치현 출생으로 무사시노미술대학 재학 중 소학관 ‘영선데이’에서 “치쿠로 유치원”으로 데뷔했다. 이후 다수의 잡지에서 ‘성인 지향’의 개그만화를 그리며 인기를 얻게 된다. 1997년 “우리집”으로 제43회 문예춘추 만화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2004년에는 “매일 엄마”로 문화청 미디어예술제상, 2005년에는 “만화가 상경기”로 제9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우리집”, “만화가 상경기”, “여자 이야기”, “영업 이야기”, “할 수 있을까”시리즈, “퍼머넌트 노바라”, “사이바라 리에코의 인생 화력 대결” 등이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여기에 소개하는 “여자 이야기”는 사이바라 리에코가 미대를 다니던 80년대 도쿄를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경험담을 그려낸 작품 “만화가 상경기”의 속편으로, 여섯 살 때 새 아빠의 고향으로 이사 온 소녀 나츠미와 나츠미가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 미사, 키이의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귀엽고 깜찍한 그림으로 표현한 독특한 작품이다. “그 뒤로 에리네 집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깨끗하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집안, 동생이랑 많이 닮은 자상해 보이는 아빠, 우리 집에서는 저녁식사 마치고나면 전기 아깝다며 캄캄하게 불 다 끄고 TV를 봤다. 에리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예쁘게 받으며 그 캄캄한 방안에서 빛나던 TV화면 속 사람 같았다. 아아, 에리도 분명 사라지겠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빠랑 동생도 이미 다 알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이바라 리에코는 일본에서 꽤나 유명한 만화가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독특한 울림이 있는 작품을 그리는 작가로, 일본에서는 그녀의 실제 삶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모양인데, 한국어판으로 소개된 사이바라 리에코의 책들을 읽어보면 ‘세상의 밑바닥부터 인생을 시작한 여자로서의 만만치 않은 관록’을 작품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AK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대표작인 “우리 집”과 “만화가 상경기”, “여자 이야기”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고, 마이니치신문에 2002년부터 10년째 연재되고 있는 만화 “매일 엄마”를 원작으로 만든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SBS를 통해 한국에서도 방영되고 있다. (동명의 원작만화가 대원키즈를 통해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되어있다.) “엄마도 주문을 외우면 좋을 텐데,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고 아빠랑 엄마도 다 이뻐해준다. 미사네 집에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엄마가 있고, 키이네 집은 다 쓰러져가는 더러운 집인데,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고 아빠랑 엄마도 다 이뻐해준다.” 사이바라 리에코의 작품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귀여운 그림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어떤 이는 ‘반어법의 달인’이라고 사이바라 리에코를 소개하던데, 그것도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아무튼 아직 그녀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작품 속의 세상이 불쾌하고 짜증나더라도 결코 분노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사이바라 리에코의 작품에는 ‘삶의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비록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일지라도 ‘희망’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주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엄마의 모습은 하나같이 친구도 없고 아빠랑 싸움만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어른이 되면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더럽고 냄새나는 옷과 물려받은 고물 자전거, 만들다 망친 목각인형 같은 표정을 짓던 우리 마음속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사실 이 작품은, ‘만화’라기보다는 일러스트가 많은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만화와는 형식면이나 정서적인 면에서 아주 많이 다른데,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작화가 주는 직접적인 단순함에 비해 주인공의 독백과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느낌을 준다. 슬프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느낌의 문학적인 감수성이 포장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여과 없이 전달된다는 느낌이랄까? “키이도, 미사도, 나도, 가능한 한 멀리 병을 던졌다.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 나를 전부,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줄 애가 있을 것이다. 내 짝꿍은 분명 저 멀리서 찾아올 것이다. 꿈 많은 소녀들이던 우리는 계속 그렇게 믿었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공상과학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그려지던 21세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덕에 교통 체증이 사라지고, 로봇들이 일을 대신해주었으며,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달로 관광을 가던 모습이었다. 그 화려하고 신기한 미래에는 아픈 사람도 없고, 슬픈 사람도 없이 다들 사이좋게 지내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막상 진짜 21세기가 되고 보니, 인간의 삶은 예전보다 훨씬 불행해져 버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여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녀들 역시 아름답고 반짝이는 미래를 간절히 원했지만 운명처럼 들러붙은 불운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행복해질 수 없었다. 키이는 계속되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 사이비종교에 빠져 딸과 함께 살고 있고, 미사는 아는 사람들 모두한테서 돈을 빌려 사라졌다. 나츠미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로 다짐하며 거리를 떠난다. “내 소중한 친구들, 그런 친구들은 평생 두 번 다시 사귈 수 없을 것이다.”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된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찾아내 행복해지려하는 소녀들의 고군분투 성장기, “여자 이야기”는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추(醜)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불행이란 그저 삶의 또 다른 모습일 뿐,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2009년에 “여자아이 이야기(女の子ものがたり)”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일본여배우 후카츠 에리가 주인공인 나츠미 역을 맡았다고 하는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영화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