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카몬
“선생님도 빨리 와, 이 벽을 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보여” 자신의 글씨가 ‘평범하고 지루하다’라는 평가를 받고 폭력을 행사한 젊은 서예가, 귀양을 오듯 도시를 떠나 도착한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서쪽 끝의 조그만 섬에서 그는 인생의 진정한 변화를 겪게 된...
2012-06-28
석재정
“선생님도 빨리 와, 이 벽을 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보여” 자신의 글씨가 ‘평범하고 지루하다’라는 평가를 받고 폭력을 행사한 젊은 서예가, 귀양을 오듯 도시를 떠나 도착한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서쪽 끝의 조그만 섬에서 그는 인생의 진정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오랜만에 접한 본격 ‘치유계’ 만화, “바라카몬”의 줄거리다. 이 만화의 제목인 “바라카몬”은 제목 ‘씩씩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작품의 무대가 되는 ‘고토’의 사투리 ‘바라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 만화에서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인공인 ‘한다’에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을 선사하는 꼬마 ‘나루’를 지칭한다. “나한테서 서예를 빼면 아무 것도 없으니까, 1등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 어제 밤에 아무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게스트로 출연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3대 연예기획사’ 중 하나로 불리는 ‘YG 엔터테인먼트’의 창립자 양현석이었다. 90년대에 ‘서태지와 아이들’로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가 은퇴한 후 ‘빅뱅’, ‘2EN1’처럼 최고의 상종가를 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을 양성한 그의 인생이야기가 궁금했기에 나름 집중해서 보았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묘하게 내 기억에 남은 그의 말이 있었는데, “잘 사는 사람들을 못 보고 자랐고, 주위에 잘 사는 사람들도 없어서 뭐가 잘 사는 건지를 몰랐어요.”라던 그의 어린 시절 추억담이었다. 빈곤과 풍요, 우월감과 박탈감, 자긍심과 소외감 등등 현대인들을 자괴감에 빠트리고 스스로를 ‘고통의 나락’에 빠져들게 만드는 모든 ‘부조리’한 일들은, 철학적으로 볼 때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상황에 비추어 ‘비교’하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 주위가 모두 가난하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부자’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물질적인 ‘부(富)’란 자신과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이나 노장철학에서 말하는 무위의 개념 역시 이러한 인식과 상통한다. “밑을 쳐다보소, 찬스는 의외로 밑에 떨어져 있는 법인기라.” “바라카몬”에서는, 이방인으로서 섬에 흘러들어온 도시의 서예가가 자연 속에서 ‘소요유(逍遙遊)’의 삶을 살아가는 섬 주민들과 서서히 일체화 되어가며 자신을 괴롭히던 집착이나 욕망을 떨쳐가는 과정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인 한다 세이슈가 가장 강렬하게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글씨를 남에게 인정받아 최고가 되는 것, 즉 공모전이나 각종 대회에서 1등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1등이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출중한 재능이 있는데도 자신은 낙오자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그런 그에게 천진난만한 여자아이 나루나 자신의 삶을 자연의 순리와 일체화시킨 섬의 주민들이 일상 속의 자그마한 일들을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깨달음을 준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서서히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던 한다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고 그의 내부에서부터 굳건하고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어간다.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