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 이승편
“이곳은 한울동 101-5번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 변소와 장독대가 있는 낡은 집이다. 집주인은 올해로 일흔 여섯인 김천규 옹과 손자 일곱 살 김동현, 동현이 아빠는 삼년 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고, 그로부터 일 년 후인 작년, 엄마는 동현이를 이곳에 맡긴 후 ...
2012-06-22
유호연
“이곳은 한울동 101-5번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 변소와 장독대가 있는 낡은 집이다. 집주인은 올해로 일흔 여섯인 김천규 옹과 손자 일곱 살 김동현, 동현이 아빠는 삼년 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고, 그로부터 일 년 후인 작년, 엄마는 동현이를 이곳에 맡긴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왜 엄마 욕을 하는지 할머니가 왜 맨날 우는지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그리고 작년 겨울,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장례식 때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혼자 집에 놔두기도 뭐하고, 굳이 따라온다는 걸 막을 수 없어서 할아버지와 동현이는 늘 함께 다니고 있다.” 작품의 1부에 해당하는 “저승편”에서 저승에 관한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개성만점의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환상적으로 엮어냄으로써 많은 독자들에게 가슴 먹먹한 공감을 이끌어냈던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 2부에 해당하는 “이승편”이 완결되었다. 1부 “저승편”은 3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었고 2부 “이승편”은 2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저승편”에서는 작품의 주된 모토인 “삶과 죽음”, “인과응보” 등의 심오한 철학적 개념을 대중들에게 전달되기 쉽도록 한국의 신화 중 하나인 ‘저승과 사후재판’에 빗대어 ‘착하고 바르게 살자’라는 확실한 메시지로 변환시켰다면, “이승편”에서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자본과 권력에 의한 부조리한 현실과 그에 휘말려 고통을 겪으며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있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국의 신화와 드라마틱하게 엮어놓음으로써 읽는 이에게 “슬픈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저승편”은 전체 스토리 중에서 다소 슬프고 속상한 에피소드가 있더라도 작가 특유의 유머감각이 잘 발휘되어있어서 다소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승편”은 소재 자체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런지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 이야기가 ‘만화’이고, 누군가가 창작해낸 픽션인걸 분명히 알고 있어도, 내 주위에서 아주 가깝게 볼 수 있는 현실과 소름끼치도록 겹쳐져서 감정조절이 잘 되질 않았다. 너무 자극적인 소재의 슬픈 이야기라서 그런지 작가의 깨알 같은 유머를 통해 읽는 이의 감정을 어느 정도 중화시켜 주는 효과가 반감되었고 만화를 읽으면서 내 스스로 ‘분노’를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고발해! 네 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냐? 우리 집 꼬맹이 내일 처음으로 학교 가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 손 잡고 학교 가는데 왜 우리 집 꼬맹이는 장례식에 가야되는 거냐? 그것도 자신이 고아가 되는 장례식에 말이다!” “저승편”이 ‘저승변호사’ 진기한과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세 명의 저승차사들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였다면, “이승편”은 시간에 맞춰 저승으로 영혼을 데려가야 하는 저승차사들과 이들에 맞서 억지로라도 예정된 죽음을 늦추려 싸우는 ‘가택신(家宅神)’들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가 되었다. ‘가택신(家宅神)’이란 개념은 ‘집안을 평안하게 보살펴 주는 신’이 있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간 신화중 하나로 성주신, 토주신, 제석신, 측신 등이 있으며 머무는 장소에 따라 집안 구석구석에 다양하게 존재하며 각자 수호하는 분야가 다르다고 한다. 이번 이야기에 소재가 된 ‘가택신’ 이야기를 보면서, 아주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아침이면 부엌과 장독대 같은 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는데, 어렸을 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던 그 의식이 바로 가택신들에게 가족들의 무사평안을 빌던 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기억조차 아련하지만, 가택신들에게 기도하시던 할머니에게 “할머니 뭐하는 거야?”라고 묻던 천진난만한 손자한테 “조왕신님, 성주신님한테 비는 거야, 오늘도 별 일 없으라고”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승편”에 등장해서 저승차사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가택신(家宅神)들은 집안의 대들보에 기거하며 집 자체를 지켜준다는 성주신(城主神), 부뚜막에 기거하며 부엌과 불씨를 지켜준다는 조왕신(?王神), 화장실에 기거하며 병(病)을 관장하고 성주신밑에서 형벌을 집행한다는 측신(厠神), 장독대에 기거하며 집터를 지켜준다는 터주신(基主神: 본 작품에서는 ‘철융’이라는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등장함)등이 있다. “곧 이 마을이 없어집니다. 이 집도 헐리게 되지요, 갈 곳이 없어 계속 있으니 쫓아내기 위해 행패를 부린 겁니다. 그래서 제발 지금은 데려가지 말라고 부탁한 겁니다. 여덟 살짜리 꼬마의 집과 가족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거요.” 앞서도 말했지만 “이승편”은 “저승편”과 같이 권선징악이라던가, 인과응보 같은 서사적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처절하고 슬프며,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도와줄 수 없어서 안타깝고 아픈 이야기다. 어쩌다가 인간들이 사는 이승이 지옥이나 저승보다 더 어둡고 사나운 곳으로 변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작금의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만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재개발, 뉴타운, 토지가치 상승, 집값 올리기 같은, 이제는 마치 관용어구처럼 당연하게 쓰이고 있는 한국의 부동산 용어들에서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존엄’이나 ‘인성(人性)’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승편”에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 것 일 것이다. 원래 땅이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개간하고 씨앗을 뿌려 식량과 땔감을 조달하는 생활터전이며, 집이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안식처일 뿐이다. 그러나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천박하고 저열한 ‘천민자본주의’는 땅과 집의 원래 의미를 퇴색시켜 단순히 숫자로서의 부(富), 소유재산의 일부 정도로 격하시켜 버렸다. 생존을 위한 신성한 ‘노동’이 빠져버린 자리에 독버섯처럼 자라난,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변해버린 땅과 집은 더 이상 ‘이웃’이 같이 살 수 없고, 가족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그저 단순히 ‘얼마짜리 집’인 것이고 ‘얼마짜리 땅’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다른 이에게 사기를 치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승편”의 주인공인 8살 꼬마 동현이의 눈물을, 우리는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해야한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폭주를 계속하는 이 미쳐버린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神)도 살 수 없다’는, 이 작품이 주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겨 보자. 이제는 ‘공존(共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