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노부나가의 셰프

“가라...켄, 넌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시대로 돌아가는 거야!” ‘타임슬립(Time-slip)’이라는 단어는 ‘시간(TIME)’을 ‘미끄러지다(SLIP)’의 일본식 합성어라고 하는데, 그 뜻을 굳이 의역하자면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접했던 ‘미래나 ...

2012-06-18 김현우
“가라...켄, 넌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시대로 돌아가는 거야!” ‘타임슬립(Time-slip)’이라는 단어는 ‘시간(TIME)’을 ‘미끄러지다(SLIP)’의 일본식 합성어라고 하는데, 그 뜻을 굳이 의역하자면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접했던 ‘미래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굉장히 보수적이고 명확한 시선으로 ‘일관된 톤’을 따라 만들어지던 ‘한국 사극(史劇)’조차도 요즘은 이런 판타지나 SF적인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였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까지 해서 당분간 이 장르는 소위 말하는 ‘대세’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2012년 전반기의 한국 드라마 최고의 승자는 MBC에서 방영한 판타지 사극 “해를 품은 달”이었다. 정은궐 작가가 쓴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의 가상의 왕과 액받이 무녀의 사랑이야기를 큰 줄거리로 삼아 총 20부작으로 제작되었고 42.2%라는 어마어마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인공으로 출연한 김수현이라는 배우를 하루아침에 슈퍼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요즘 어지간한 광고에 다 이 배우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드라마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의 원작소설을 쓴 정은궐 작가의 전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역시 2010년에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20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작품은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사건을 재해석한 ‘정통 사극’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스토리를 역사적인 틀에 집어넣은 ‘판타지 사극’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검색하던 중, 한류스타 송승헌과 영웅재중이 일본만화 원작인 “타임슬립 닥터 진”의 한국판 드라마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제작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이미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만화임과 동시에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어서 한국판 드라마로는 어떤 모습으로 각색될지 기대가 매우 크다. 여기서도 주목할 점은 이 작품 역시 현대 일본의 뇌신경외과 전문의가 막부말기의 에도시대로 타임슬립하게 된다는 내용의 판타지여서 당분간 문화콘텐츠산업의 대세는 이러한 ‘판타지’ 장르가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조심스레 해본다. “나는 알고 있다. 요리에 대해서도, 이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런데, 어디에서 왔고..어디에서...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는 “노부나가의 셰프”라는 일본만화로,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대세’에 부합되는 또 하나의 역사 판타지 만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현대의 뛰어난 요리사가 어느 날 갑자기 전국시대의 교토로 떨어졌고, 이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리법과 엄청난 실력으로 당시 최강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어 그의 전속 요리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앞서 예를 든 “타임슬립 닥터 진”과 아주 유사한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만화’가 되려면 중요한 것은 이런 흔한 설정을 어떤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타임슬립 닥터 진” 같은 경우는 미래의 의사가 과거로 떨어져 페니실린조차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을 살리려 악전고투하며 고뇌하는 모습을 통해 이야기의 중심을 잡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위인들이 조연으로 등장해 주인공과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을 살려주면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 요즘 유행하는 이러한 장르를 ‘팩션(fcation)’이라고 부르는데, 가상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혼재해놓음으로써 드라마의 몰입도와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이라 하겠다. 여기에 소개하는 “노부나가의 셰프”도 이 방식을 충실히 따른다. 다만 주인공의 직업이 ‘요리사’라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다른 만화들과 이야기의 차별성이 극대화된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수도 없이 많은 다양한 소재의 요리만화들’을 봐왔지만 이런 형태의 요리만화는 처음이었는데, 요리와 역사, 인물이 결합된 독특한 스토리 전개방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반드시 두 명의 인물과 함께 거론된다.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 한 명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결시키며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카와 이에야스다.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 세 명의 인물은 그들이 걸어간 길을 각색 없이 그대로 소설로 옮겨도 이미 드라마틱한 ‘서사성’을 보장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만화를 만드는 작가입장에서는 이 세 인물의 이야기 중 어떤 사건들을 따다가 이 작품에 적용시킬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암튼 이 작품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경해 ‘상락(上洛)’을 이루면서 천하재패를 향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소는 다진 오리고기와 당근, 무, 버섯 등을 다져서 볶은 것, 그것을 밥에 채워 넣어 주먹밥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먹밥을 튀겨내면 대량으로 보존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간단히 따뜻한 상태로 먹을 수 있습니다. 전장에 갖고 갈 수 있으며 유즈케보다 몇 배나 힘이 나는 인스턴트....아니 즉석식품입니다.” “노부나가의 셰프”는 한국어판으로는 아직 1권밖에 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권만으로도 이 작품이 수작(秀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실제로도 존재했던 역사적인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공인 요리사 켄이나 여자 주인공인 대장장이 나츠 같은 캐릭터들도 아주 개성이 뚜렷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캐릭터가 살아있으면 이야기가 재미있고 탄력을 받는 법이라 책장을 넘기기가 쉬워지고 무엇보다 독자들의 감정이입이 수월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첫 단추를 아주 잘 꿰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을 또 하나 들자면 시대에 대한 역사고증이 아주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읽는 맛’을 살려주는 디테일이 훌륭한데, 특히 요리에 관한 부분이나 식재료에 관한 부분들은 아주 고증이 잘 되어있다. 지금은 흔한 식재료인 감자나 고구마도 이 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던 점, 이 시대의 전투식량이란 소금과 약간의 된장, 구운 밥 정도였다는 것 등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깔고 주인공인 켄이 현대의 기술을 접목시켜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한 요리들은 읽는 이를 드라마틱한 일본의 전국시대로 빠져들게 함과 동시에, 가슴 찡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구성법이었다. 이 작품도 왠지 요즘의 ‘대세’에 포함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잘 만들어진 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