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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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남자

“이 숲에는, 아이들에게밖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곰이 있대.” “Not Simple”, “납치사 고요” 등의 작품이 한국에도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열혈 추종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열광적인 팬들을 보유하게 된 일본 만화가 오노 나츠메의 신작 “도망...

2012-06-14 유호연
“이 숲에는, 아이들에게밖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곰이 있대.” “Not Simple”, “납치사 고요” 등의 작품이 한국에도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열혈 추종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열광적인 팬들을 보유하게 된 일본 만화가 오노 나츠메의 신작 “도망치는 남자”가 한국어판으로 발행되었다. “그 곰이랑 하룻밤을 보냈다가, 무사히 숲을 빠져나오면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될 수 있대.” 오노 나츠메라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가의 등장은, ‘만화왕국’ 일본에서조차, 센세이션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신선’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일본의 평론가들이 “일본 만화계의 화두(話頭)”니 “신성(新星)”이니 하는 표현을 썼을까?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내가 아는 어떤 지인은 오노 나츠메의 “Not Simple”을 읽고서 ‘슬프고도 생경한 충격’이라는 평을 했었고, 또 다른 어떤 지인은 “납치사 고요”를 읽고서 ‘동양의 장자(莊子)와 서양의 니체(F.W.Nietzsche)가 절묘하게 융합된 드라마틱한 철학서’라는 극찬을 했었다. 오노 나츠메라는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이런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떤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 마을의 전설 알아? 너에 대한 이야기란다. 어릴 때부터 늘 듣던 이야기야, 숲에 가면 이 일대에는 멸종하고 없다는 곰이, 오두막에서 혼자 살고 있대. 낮에는 곰의 모습이다가,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하고, 날이 밝으면 다시 곰이 되지. 그 곰과 하룻밤을 보내고 무사히 숲을 빠져나오면,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있대. 하지만 어른이 돼서 이기적인 욕심을 갖게 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대, 너는 아이들에게만 보이니까” 확실히, 오노 나츠메는 신선했다. 그림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분위기도 그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였다. 처음에 출간된 “Not Simple”같은 작품은 표지만 보면 유럽 어딘가의 작가가 그린 만화인줄 알았을 정도로 ‘일본 만화’같지 않은 작화였다. 이야기 역시 매우 독특했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Not Simple”이나 “납치사 고요”외에도 “Danza”, “리스토란테 파라디조”, “젠떼”, “라 퀸타 카메라”같은, ‘소품’의 느낌이 나는 다른 작품들도 매우 다양하고 신선한 느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이를 매료시키는 독특함이 있었다. 캐릭터는 정말 ‘신기’했다. 모든 작품마다 상이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인물들마다 부여된 개성이 너무 ‘확실’해서 그냥 캐릭터들을 엮어놓는 것만으로도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구성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현세의 ‘까치’나 허영만의 ‘강토’ 같은 그 작가만의 페르소나가 전혀 없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신선함은, 모든 작품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오노 나츠메만의 ‘분위기’였다. 동양적인 느낌과 서양적인 느낌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 독특한 분위기는 예전에 보았던 어떤 만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정서였다. 도대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위기는 무얼까? 어딘가 심심하면서도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마치 충분한 여백이 있는 동양의 수묵화 배경에 강렬한 색채로 채색된 서양인이 서있는 것처럼, 낯설고 생경한 어떤 곳에 여행 온 이방인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쉽구나, 이건 독버섯이란다. 압수야, 하나라도 독이 있으면 다 못쓰게 돼.” 어쨌든 각설하고, 오노 나츠메라는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장편, 단편을 막론하고 여러 개의 타이틀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대개 어느 정도의 경력이 쌓여가면서 경험치가 높아질수록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것이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걸려드는 ‘덫’인데, 이번의 신작 “도망치는 남자”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아직 오노 나츠메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이상을 좇는 것은 상관없지만, 머리를 쓰거라.” “도망치는 남자”는 딱 한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줄거리는 너무 간단해서 민망할 정도다. 낮에는 곰으로 밤에는 남자로 변한다는 ‘전설의 곰’이 사는 숲에 들어간 한 여자가 전설의 실체를 알게 되는데, 그 실체는 숲으로 도망친 한 남자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새끼곰과 함께 살고 있는 것뿐이었다는 다소 김빠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를 근 200여 페이지에 이르는 5개의 에피소드로 솜씨 좋게 엮어놓은 오노 나츠메의 재능은 실로 대단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매 에피소드마다 적절히 배치되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이야기의 핵심인 ‘전설의 비밀’로 천천히 다가가게 만든다. 마치 타자를 요리하는 방법에 능통한 베테랑 투수처럼, 작가는 능숙하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요 나흘 동안 나는 도망쳤지...너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데에서, 너는 20년을 도망쳤어, 아직도 도망칠 거야? 이젠 도망쳐도 별 수 없어, 도망쳐서까지 지켜야 할 건 더 이상 없으니까, 너에게는 가혹한 진실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없었던 거야, 숲에서 나가자, 여기 있을 이유는, 이제 없어.” 물론 위에 설명한 것처럼 “도망치는 남자”의 스토리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 그리고 곰 한 마리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전부이지만 오노 나츠메는 ‘도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절묘하게 이들을 엮어놓는다. 인생에 남은 미련은 아무 것도 없었던 남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 남자, 새로운 자신으로 변하기 위해 도망친 여자, 도망친 남자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잠시 도망친 남자를 동물원에서 도망친 새끼 곰 한 마리가 모두 엮어주는 방식인 것이다. “너도 도망쳐 왔구나, 나는 도망쳐서 여기까지 왔지, 그리고 너와 함께 사는 길을 택하면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피해 다시 도망쳤어. 나는 인생에 남은 미련이...아직 얼마든지 있어, 도망치지 않으면, 아직 얼마든지 있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펼쳐지는 ‘두 번째’ 남자의 담담한 독백은 무언가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읽는 이에게 전해준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와 단순한 캐릭터들을 절묘하게 엮어놓음으로써 단단한 메시지 하나를 독자에게 전해주는, 오노 나츠메의 ‘관록’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오노 나츠메의 팬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께는 다소 난해할 것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