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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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목/태공망전

“무면목이란 별명이고 본래 이름은 혼돈(混沌)이라 하네,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되 얼굴이 없으며 천궁산 바위 위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지내지, 듣자하니 천지개벽 이전부터 사색을 계속하고 있다는 구먼.” 요즘 한국어판으로 출판되는 일본만화들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2012-06-08 석재정
“무면목이란 별명이고 본래 이름은 혼돈(混沌)이라 하네,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되 얼굴이 없으며 천궁산 바위 위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지내지, 듣자하니 천지개벽 이전부터 사색을 계속하고 있다는 구먼.” 요즘 한국어판으로 출판되는 일본만화들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독특한 작가 한 명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모로호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郞)’다. 만화를 잘 읽지 않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혀 알 길이 없을 작가이고, 만화에 관심이 많거나 주위사람들에게 “덕후”소리 좀 듣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반가울 작가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1949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벌써 환갑이 넘은 노작가(老作家)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 중에는 일본 만화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작품들이 많은데, 그 특유의 기발함과 충격적인 전개방식으로 일본에서도 많은 ‘오타쿠’들의 숭배를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어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스스로가 “오타쿠”라고 공인하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오타쿠라면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읽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 걸 보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실제로 안노 히데아키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그림자의 거리”에서 영향을 받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간 저작권 문제가 걸려서 한국어판으로 수입이 안됐던 것인지 아니면 만화계의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자 하는 출판사들의 전략인지는 몰라도, 요 근래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들이 한국어판으로 속속들이 출간되고 있다. “서유요원전”, “사가판 어류도감”, “사가판 조류도감”, “암흑신화”, “공자 암흑전”, “스노우 화이트”, “머드맨”,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한 이야기”,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등등 그의 대표작을 비롯한 단편집들이 요 근래에 한국어판으로 많이 소개되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무면목/태공망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그린 두 개의 작품이 묶인 책으로 AK 커뮤니케이션즈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러하다. 나는 원래 태극이 본질적으로 내포하던 순수한 지(知)의 일부분이다. 태극으로부터 만물이 태어나던 순간 지(知)의 일부분이 하나로 뭉치고 음양의 기가 모여들어 형태를 이룬 것이 바로 나다. 이 근본적인 지(知)는 태극으로부터 태어난 만물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이다. 범속한 인간들은 깨닫지 못하지만 종종 이를 깨우친 자들이 도를 닦아 신선이 되기도 하지.” 첫 번째 이야기인 “무면목(無面目)”은 “장자(莊子)” 내편(內篇) 7개 중 마지막 편인 ‘응제왕(應帝王)’에서도 마지막 편 ‘혼돈의 죽음’이라는 75자로 구성된 짧은 이야기를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만화로 각색한 것이다. 장자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남해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渾沌)이라 한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매우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으므로,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논의해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7규(七竅: 일곱 개의 구멍 즉 눈, 귀, 입, 코)가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없으므로 시험 삼아 구멍을 뚫자”고 했다.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이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기승전결이 살아있는 한 편의 만화로 각색한다. 한나라의 무제(武帝)시절로 이야기의 배경을 삼고, 천궁산에서 태초부터 사색만 하고 있던 얼굴이 없는 무면목(혼돈)에게 동방삭과 남극노인이 이목구비를 그려 넣어 줌으로써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와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로, 한무제 때 실제로 일어난 옥사(獄事) 무고지화와 더불어 섞어 제법 재미있는 판타지로 만들어냈다. “그래! 용케 용(龍)을 낚았구나! 만약 네가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나와 만날 수 있다면, 그 때에 너는 더욱 큰 용도 낚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태공망전(太公望傳)”은 중국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중국의 왕조 중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주(周)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태공망 여상’(우리나라에서는 낚시꾼들의 상징인 ‘강태공’이라고 잘 알려진)의 이야기를 모로호시 다이지로 특유의 필력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태공망 여상에 관해 기록된 실제 역사에서는, ‘일생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안목과 식견을 쌓고 나이 70이 넘어서야 서백후 희창(훗날의 주 문왕)을 만나 입신(立身)하여, 그를 도와 은나라를 무너트리고 천하를 평정한 후, 주 문왕(文王)이 천하를 봉분할 때 제(薺)나라의 영토를 하사받았다.’고 되어있다. 그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병법가(兵法家)’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육도(六韜)”라는 중국 최초의 병법서를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기도 했다. 본명은 ‘강상(姜尙)’또는 ‘여상(呂尙)’이라 하며 주 문왕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던(望)’ 사람이라고 해서 ‘태공망(太公望)’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주군인 주 문왕을 도와 은-주 역성혁명을 주도한 재상이자 전략가이며 명나라 때 발표된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온 신선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바늘이 없는 낚시를 던져놓고 때를 기다리던 태공망이 서백후를 만나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는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다소 판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지만, 어찌됐든 이 이야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도 낚시를 즐기는 애호가들을 ‘강태공’으로 지칭하나 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이 중국의 고사(古史)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덧붙여 아주 흥미로운 태공망을 창조하게 되는데, 중국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작품 후기에서 “당초 목표는 역사에서든 전설에서든 처음부터 노인으로 등장하는 태공망의 젊은 시절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