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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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 리쿠

“사람은 별을 보며 생각한다. 또한 그 빛에 자신의 미래를 포개어놓고, 사람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별이 속삭이는 운명과 희망의 울림에..., 그리고 그날 밤도 별은 속삭였다. 굉음과 함께....운석 직격, 도쿄 괴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이...

2012-05-11 김진수
“사람은 별을 보며 생각한다. 또한 그 빛에 자신의 미래를 포개어놓고, 사람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별이 속삭이는 운명과 희망의 울림에..., 그리고 그날 밤도 별은 속삭였다. 굉음과 함께....운석 직격, 도쿄 괴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이라 불리며 독특한 세계관과 뛰어난 스토리 전개, 아름답다고 표현될 만큼 화려한 작화로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산(産) 애니메이션의 역사에는 ‘레전드’로 기억되는 몇 개의 명작들이 있다. 이들 ‘전설의 명작’들은 발표 시기나 흥행여부와 관계없이 후대의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선사하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영원한 소장가치를 불러일으키는 명작들이다. 이들 명작들은 스토리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나 세계관이 훌륭하거나, 연출기법이나 표현기법이 매우 독특하거나, 최고의 개성과 매력을 지닌 캐릭터들이 등장하거나 하는, ‘자신만의 확실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다. ‘기동전사 건담’같은 경우는 1979년에 첫 시리즈가 발표된 지 어언 30여년이 넘어가지만 지금까지도 계속적인 새 시리즈가 제작되며 세대를 넘어서 여전히 사랑받는 명작이고, ‘공각기동대’같은 작품은 암울한 묵시록적인 느낌의 철학적 세계관이 강렬하게 돋보이는 명작이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 “죄수 리쿠”도 이러한 ‘전설의 명작’들에게 강한 영감을 얻고 축복의 세례를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첫 페이지에 강렬하게 표현된 ‘도쿄 괴멸’ 장면부터 오토모 가츠히로의 명작 ‘아키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도쿄 괴멸 10년 후’라는 작품의 시작이 되는 설정에서는 ‘아키라’의 ‘네오 도쿄’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나 “죄수 리쿠”가 ‘아키라’의 영향을 받은 스토리나 작화임이 분명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란 걸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창조는 모방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명제를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 작품에는 ‘모방’ 이상의 것이 분명히 담겨있다. “선고!! 우리는 오직 이 슬럼지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경찰청 내에 특별 설치된 특급기동대다! 또한 우리는 신속한 치안 회복을 꾀하기 위해 재판을 거치지 않고 교도소로 보낼 권한을 가졌다! 이상! ....꼬마야, 네가 이 소동의 주범이냐, 주위 사람 모두가 신고 의무 아래 너를 가리키고 있는데” 운석의 직격충돌로 폐허가 된 도쿄로부터 10년 후, 운석이 떨어져 폐허가 된 구도심 중심부는 범죄와 가난이 넘쳐나는 슬럼가로 변해버렸다. 재난을 피해 온전히 살아남은 자들은 범죄자나 가난한 약자들을 이곳으로 내쫓고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투명강화유리로 빙 둘러 격리시켰다. 슬럼가 바로 건너편은 여전히 풍족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그 모습을 슬럼가의 주민들은 매일 매일을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며 유리창 건너편에서 바라보고만 있어야하는 비참한 삶 속에 방치되어 있다. 슬럼가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여서 어린 꼬마아이들도 총을 들고 다니며 먹을 것을 약탈하러 다닐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특기대’라 불리는 범죄의 진압 및 수사 외에 사법적인 판결까지 직접 할 수 있는 특수경찰을 슬럼가에 배치함으로써 범죄자나 가난한 자들이 슬럼가를 벗어나 자신들의 생활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키라’나 ‘총몽’, ‘인랑’ 같은 명작들이 떠오른다. 마치 그간 발표된 명작들 중에서 암울하고 날카로운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에서만 이야기의 소재를 따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풍요로운 도시로부터 격리된 슬럼가’는 ‘총몽’의 ‘고철도시’가, ‘날 때부터 차별과 불편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키라’의 ‘실험체 26호’가, ‘권력자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편의와 안전과 풍요를 위해 가난한 자들과 범죄자들을 무력으로 관리하는 통제시스템’은 ‘인랑’의 ‘특기대’가 떠오른다. 하지만, 비록 이런 ‘전설의 명작’들로부터 묵시록적인 세계관을 상속받아 작품의 바탕에 깔았지만, “죄수 리쿠”는 위에 언급한 명작들처럼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 ‘사이버펑크’류(類)의 스토리나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오히려 ‘인간승리’ 같은 내용의 ‘휴먼드라마’의 방향성을 고수한다고 할까? “그때는 아직 그런 벽도 생기지 않았으니까, 재해로 인해 거리나 사람들 마음도 황폐해지고, 정부는 범죄다발지역을 벽으로 둘러싸 버렸어, 정말 말도 안 되는 미봉책이지, 여기는 그야말로 양동이 안... 더럽혀진 물이 밖으로 넘치진 않지만 계속해서 썩어만 가, 한 번 뒤집어서 더러워진 물을 쏟아내고 깨끗한 물로 갈기 전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단다.” 주인공인 리쿠는 슬럼가에 사는 배짱 있고 야무진 소년이지만 이 시대엔 보기 드문 강한 ‘의협심’의 소유자기도 하다. ‘이 시대엔 어울리지 않는’ 강하고 바른 소년 리쿠가 사랑하는 사람을 권력자의 음모에 의해 잃고 오히려 자신이 그 사람의 살인범으로 몰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극락도 특급교도소로 끌려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인 것이다. 리쿠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만 모여 있다는 극락도 특급교도소에서 비록 소년의 몸이지만 자신의 대의를 지키고 의리를 중요시하며 불의에 맞서는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다. 리쿠에게는 주위를 둘러싼 폭력적인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결탁해 자신을 괴롭히는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교도관들도 모두 적이다. 그러나 리쿠는 절대 굽히지 않고 역경과 고난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의 몸을 던져 위기를 극복해 나아간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리쿠....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을...믿고...”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실력이 돋보이는 ‘차가운 느낌’의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이질감’이 “죄수 리쿠” 작화의 큰 특징이다. 배경이나 인물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사이버펑크’ 류(類)의 건조하고 냉정한 느낌이 물씬 나는데도, 작가가 애정을 가진 인물(주인공인 리쿠나 착한 조연들)들이 등장할 때면 같은 그림인데도 갑자기 ‘따뜻한 분위기’가 확~하고 느껴진다. 작가의 뛰어난 작화력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생경한 경험이었다. 아직 한국어판으로는 1권밖에 나오질 않아서 전반적인 스토리는 다 파악할 수 없지만 굳이 한 번 더 명작을 인용하자면 ‘내일의 죠’ 스타일로 전개 되지 않을까 예상 해본다. ‘경관살해범’이란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힌 소년이 강하고 멋진 남자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보이는데,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이 고전적인 스토리에 ‘SF묵시록’을 설정으로 결합시켜놨다는 것이다. 작화, 설정, 캐릭터, 연출, 스토리 모두 다 수준급이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