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치카라

“유명 여배우가 연인의 뒤를 좇아 자살하자 세상에는 ‘자유연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이칼라 여학생으로서 시대의 첨단을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사랑’이 뭔지 난 잘 모르겠다. 지금 나의 꿈은 사랑보다…..” “Flower”의 작가 와다 나...

2012-01-10 유호연
“유명 여배우가 연인의 뒤를 좇아 자살하자 세상에는 ‘자유연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이칼라 여학생으로서 시대의 첨단을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사랑’이 뭔지 난 잘 모르겠다. 지금 나의 꿈은 사랑보다…..” “Flower”의 작가 와다 나오코의 신작 “치카라”의 한국어 판이 발행되었다.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독자들에게는 다음 권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높은 완성도와 빠른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에 나온 일본 순정 만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감정묘사와 애잔하고 서사적인 스토리를 갖추고 있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다이쇼 9년의 니혼바시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며 침략전쟁으로 치닫기 바로 전의 과도기적인 시대로, 메이지 유신 이후 갑작스러운 근대화로 인해 서양의 문물과 일본의 전통이 마구 뒤섞이고 유신 이후 정신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 개혁과 안정 사이에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던 다이내믹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보자면, 다이쇼 시대(大正時代)는 역사적으로는 정확히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던 1912년 7월 30일부터 1926년 12월 25일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며, 이 시기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그 혼란을 틈타 사회주의자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에게는 6천여 명의 재일조선인이 무자비하고 억울하게 학살당한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현대 사조(思潮)가 천황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하는 인식이 태동하고 점증한 시기이다. 특히 신성한 천황제를 현대 문명의 렌즈로 보려 하는 추태에 대해 반발하는 견해가 일어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동맹군으로 출병한 일본이 중국에서 독일 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고 1920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는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일본 경제가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는데, 아시아 시장을 상대로 한 공업용품 수출로 생긴 막대한 이익을 챙겨 대재벌이 등장하고, 쌀과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제적 양극화가 극대화된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도 했다. 1819년 토야마 현에서 굶주림에 지친 민중들이 쌀가게를 습격하는 소위 말하는 ‘미곡 소동’이 벌어졌으며 이것을 계기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천황제에 반대하는 급진사회주의정당인 일본 공산당이 창당된 시기이기도 하다. 토야마 현의 미곡 소동 이후 평민재상 하라다카시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을 구성하였고, 1925년 선거법을 개정하여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또한 치안 법을 제정하여 불붙은 각계의 사회운동을 원천 봉쇄하였다. 1923년 일본 경제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쯤, 관동 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관동 대지진이다. 대재앙의 혼란을 틈타 전부터 사회의 변화에 불만을 품던 몇몇 수구 기득권 세력에 의해 재일 조선인 6천여 명의 무자비한 학살까지 포함한 수많은 인명이 참살된 ‘사회주의자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끔찍했던 이 엄청난 재앙을 겪으며 성장 일로의 일본 경제도 한풀 꺾이는 듯 했으나 이후 재건 사업에 들어간 일본은 전화와 자동차, 지하철 등이 생기고 도쿄를 중심으로 고층 빌딩이 생겼으며 라디오 방송과 신문, 잡지 등의 매스미디어가 나날이 발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천황제와 내각제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사회적 부는 팽창일로로 치닫는, 폭발 직전의 증기 기관차 같던 시대라 하겠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와 민주화를 사회의 정책방향으로 잡아가던 일본은 다이쇼 시대의 극심한 혼란과 팽창을 거쳐 쇼와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내부의 압력을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침략정책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잔인한 소용돌이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인들을 휘말리게 만드는 참극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긴자 거리는 메이지 시대에 ‘긴자 벽돌 거리’가 생기면서 유럽 풍의 풍광을 갖게 된 최신식 번화가 입니다. 언제부턴가 그 벽돌 거리에는 신문사가 모이기 시작해 일본 최고의 신문사 골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치카라”는 바로 이 혼란스러웠던 변화의 시대인 다이쇼 시대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신문기자를 꿈꾸는 치카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매우 서사적인 느낌의 로맨스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는 모리 카오루의 ‘엠마’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의 일본 순정 만화답지 않게 매우 강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시대의 혼란과 변화를 지면 안에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담고 있으며, 아주 빠른 호흡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1권의 분량만으로도 이렇게 빠른 이야기 전개는 요즘의 일본 순정만화치고는 매우 드문데,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작품의 무대가 되는 시대의 특성이 아주 잘 맞물려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주인공인 치카라의 정혼자로 나오는 야망에 가득 찬 냉혹한 신문기자 카자마 나카바 같은 캐릭터는 그간 일본 순정만화에서는 본 적이 없는 강렬한 남자 캐릭터다. 1권을 읽는 내내,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던 일본 드라마 “화려한 일족”을 떠올렸다. 작품의 풍 자체가 전국시대나 막부 말기를 무대로 한 대하 사극 같은 느낌이라기 보다는,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이나 7-80년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고풍스럽고 강렬한 느낌의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상하면서도 의지가 되는 왕자님 풍의 남자 캐릭터와 야망과 욕망에 가득 찬 파멸형 남자 캐릭터 사이에서 여자 주인공이 방황하는 삼각관계를 로맨스의 기둥으로 세우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여자 주인공인 치카라에게 ‘신문기자’라는 확실한 꿈이자 목표가 되는 비전과 강인하면서도 상냥한 여성스러운 성격을 동시에 부여해 작품의 중심을 흔들리지 않게 한 작가의 배려가 눈에 띤다. 앞으로의 전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 지는 시대의 폭풍 속으로 주인공들이 휘말리게 되면서 가열찬 고난이 시작될 듯 한데,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음 권이 정말 기대가 되는, 오랜만의 수작(秀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