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 누가 처음에 한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좋은 일이 생길거래. 하나부사 차장님 전철을 타면....” 가을 햇살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오후, 인테리어가 아주 예쁜 커피숖 야외테라스에서 은은한 커피향기를 즐기며 맛있어 보이는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문 행복한 표정의 여성, 그녀 주위엔 커피숖에서 틀어놓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재즈블루스가 흐르고 기분 좋게 온몸을 감싸주는 잔잔하고 시원한 바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약간은 설렌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의 커피 잔 옆에 놓여있는 책 한 권, 한가로운 그녀의 시선 앞으로 일상에 속한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바삐 지나가지만, 그녀 주위의 시간만 여유롭게, 천천히 흘러가는 듯 보이는, 마치 TV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예쁘고 세련된 광고 같은 어떤 풍경. 여기에 소개하는 리츠 미야코의 옴니버스 단편집 “순환백마선 차장 하나부사씨”는 읽는 이에게 이런 풍경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첫 번째 손님은 반대방향으로 멀리 돌아가는 전철을 탄 손님이었습니다.” 총 3화로 이루어진 “순환백마선 차장 하나부사씨”는 1화에서부터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아주 부드럽고 잔잔한 느낌의 감동을 전해주며 사람을 매료시킨다. 1화는 “세 명의 손님”에 관한 이야기로 이 세 명의 손님이 하나부사씨를 만나 어떤 식으로 행복해졌는지를,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잘 엮어낸 완성도 높은 단편이다. 1화의 스토리나 캐릭터, 작화 등 만화를 이루는 개별적인 요소들도 매우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아주 매끄럽고 섬세한 솜씨로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잘 엮어내 읽는 이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남기는 탁월한 연출력이 최고였다. 1화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해도 그 자체로 완성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확실한 완결성이 있는 개별 작품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주인공 캐릭터인 “하나부사씨”의 매력이 워낙 높아 1화로 끝내기엔 작가나 편집부나 너무 아까웠을 것이다. “계속 타인으로 있는 게 손님을 위한 거야, 타인이면 언제든 탈 수 있고, 또 자유롭게 그만 탈 수도 있잖니? 타인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리고 싶지 않는 법이야, 난 그냥 차장일 뿐이고, 넌 그냥 차장 견습이야, 처음 타는 손님, 매일 타는 손님, 멀리까지 가는 손님, 근처까지만 가는 손님, 누가 제일 중요할까? 손님은 다들 그냥 손님이야, 처음 타든 매일 타든 같은 손님이란다.” ‘타는 것도 타지 않는 것도, 정하는 건 손님입니다.’라는 차장 하나부사씨의 독백처럼 이 만화의 의미를 절묘하게 함축시키는 대사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 ‘순환백마선’이라 불리는 아주 예쁘고 고풍스러운 전철이며, 시발역과 종착역이 같은,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전철의 객실 안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루어진다. 주인공인 하나부사는 이 열차의 차장이며, 그는 매일 매일 무뚝뚝한 얼굴과 담백한 말투, 절도 있고 위엄 있는 몸짓으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에게는 어린 소년이었던 자신을 ‘순환백마선’안에 버리고 간 어이없고 나쁜 진짜 부모가 있지만, 그가 진짜로 가족이라 생각하는 건 버려진 아이인 자신을 돌봐주고, 아껴주었으며, ‘이 아이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어’란 바람 하나로 ‘차장 견습’으로 가르쳐 결국 진짜 ‘차장’으로 만들어준 전임 차장 ‘하나부사’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결국 주인공인 ‘하나부사씨’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부사 본인의 이름이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에게 ‘순환백마선’에서 버려지고,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순환백마선’에서 진짜 가족을 만났으며, ‘순환백마선’에서 업무와 직업철학에 대한 교육을 받아 결국 ‘차장’이 되었다. 주인공인 하나부사씨에게 ‘순환백마선’은 인생의 무대이자 인적 교류의 장이며 추억과 기억, 슬픔과 기쁨이 혼재하는 감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즉, 하나부사씨에게 ‘순환백마선’은 ‘모든 것’인 것이다. “두 번째 손님은 일주일 동안 하차하지 않은 손님이었습니다.” 앞서 얘기 했듯이 “순환백마선 차장 하나부사씨”는 총 3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별운행’이라는 제목으로 뒷이야기를 소개하는 짧은 외전 한 편이 수록되어있다. 그 중에서 작품의 시작이 되는 1화는 위에서 간단히 설명하였고, 2화는 가슴 아프면서도 따뜻한 감동이 밀려오는, 읽는 이에게 매우 복잡한 느낌을 주는 단락인데, 하나부사의 과거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인 전임 차장 하나부사씨와 얽힌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다. “만남과 이별의 수는 비슷하지만, 가장 많은 건 ‘만나지 않는다’입니다. 자기가 타기 전에 내린 사람들과 자기가 내린 후에 탄 사람들이랑은 만날 수 없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합승한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같이 탔던 사람은 행운이죠.” 2화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인연”의 무게 또는 소중함이었을 것이다. 버려진 아이인 소년을 ‘차장 견습’으로 키워준 전임 차장 하나부사씨, 그 하나부사씨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20년 전에 헤어진 어떤 남자, ‘기쁨을 준 친절’에 감동해 이름도 모르는 어떤 차장을 다시 찾아온 어느 아가씨 그리고 주인공인 현재 차장 하나부사씨, 이 네 사람이 엮어가는 아기자기함이 돋보이는 2화다. “여기선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지만, 우리가 이어주는 마을이나 사람들을 통해 생겨나는 것도 있을 테지, 나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게 무언지 모를 뿐이야.” 3화에서는 ‘하나부사씨’가 차장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어느 시절의 이야기다.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의 청소년기의 하나부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차장 견습에서 정식 차장으로 발령을 받고, 직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또래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만 그는 이미 ‘순환백마선’안에서 ‘변화 없는 일상’을 일찍 시작해 버린 조숙한 청소년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에 그는 온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아름답고 신기한 그림을 그리는 또래의 어느 소년 화가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과 직업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의 일상, 우정 쌓기, 이별을 통해 처음으로 만난 또래의 ‘친구’를 얻게 되고, 자신의 직업에 대해 확실한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순환백마선’을 자신의 ‘있을 자리’로 확정한다. 짧지만 아주 촘촘하고, 유려하고 부드럽지만 무언가 짠한 감동이 밀려오는, 90년대 일본 영화 같은 느낌의 담백하고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오랜만의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