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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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연가

“교토의 거리는 바둑판 모양, 그 틈을 메우듯 작고 좁은 길이 곳곳에, 사람이 살고 고양이가 가로지르는 그 길을 사람들은 골목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어떤 골목길에 모여 사는, ‘만드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천연소재로 가자”, “GO! 히로미 GO!”, “...

2011-11-23 김현우
“교토의 거리는 바둑판 모양, 그 틈을 메우듯 작고 좁은 길이 곳곳에, 사람이 살고 고양이가 가로지르는 그 길을 사람들은 골목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어떤 골목길에 모여 사는, ‘만드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천연소재로 가자”, “GO! 히로미 GO!”,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등의 작품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Mikoto Asou가 잔잔한 감수성을 무기로 삼아 독특한 순정만화 한 편을 선보였다. 교토의 운치 있는 나가야(長屋, 일본식 연립 주택 또는 다세대 주택의 일종, 여러 세대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면서 외벽을 공유하는 건물, 또는 긴 하나의 건물을 수평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출입문을 만든 형식의 주택을 말한다)를 무대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옴니버스 연작 형식으로 묶어낸 “골목길 연가”다. “세상에서 오직 한 권뿐인 손님의 책입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 즉, 장인(匠人)들의 삶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기술자이면서 작가이기도 한 그들의 삶은 일반인들에게는 단순한 아르바이트, 어쩔 수 없이 하는 밥벌이라 여길만한 일에도 자신만의 신념과 고집 같은 것을 주입하려하기 마련이고, 자신만의 확고한 미학(美學)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물건에 확실히 투영되어있길 바란다.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평범’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려 노력하는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들은 조금은 괴팍하고, 어딘가 달라 보이며, 상대하기가 그리 편안하지 않은 그런 느낌의 사람들이다. “수작업 책 공방 ‘綴(토지)’, 제본 주문 받습니다. 시내 변두리 뒷골목에 자리 잡은 그 가게는, 어찌된 일인지 오늘도, 손님은 노인, 사람보다도, 책을 한없이 사랑하는 가게 주인 코하루 씨는, 추억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손님의 요청대로 담담하게, 개인감정 개입엄금을 신조로...” “골목길 연가” 1권(한국어판 발행 학산문화사)에는 총 다섯 명의 장인(匠人)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가 수작업으로 책을 만드는, 종이를 한없이 사랑하는 여자 코하루, 두 번째는 은을 세공해서 갖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세공기술자 미츠오, 세 번째는 미소가 아름다운 화가 타츠미, 네 번째는 소설가이자 찻집주인 이자와, 다섯 번째는 수제양초를 만드는 아사미다. 이 다섯 명의 장인(匠人)에게 손님으로 접근한(?) 또 다른 다섯 명의 남녀들도 등장하는데 이들도 결코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코하루에게 자신의 악보를 책으로 만들어달라고 온 남자 토와다는 ‘세이킹 헤즈’라는 인기 밴드의 일원이었던 뮤지션이었고, 미츠오에게는 남자가 생길 때마다 그 남자를 기억하기 위한 장신구를 주문하러 오는 독특한 단골손님 후우카가 있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모르는 타츠미에게는 유능한 매니저처럼 곁에서 그를 챙겨주는 히나코가 있다. 소설가이자 찻집주인인 이자와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당돌한 구석이 있는 케이크 가게 딸 나오미가 있고 양초를 만들며 은은한 매력을 풍기는 아사미에게는 웨딩홀 직원인 혼마가 있다. “골목길 연가”는 이 다섯 쌍의 청춘남녀들이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사랑이야기로 매끄럽고 잔잔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고흐와 테오, 생전에 팔린 그림이 단 한 장이었다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생활을 책임졌던 것은 바로 그 동생인 테오도뤼스, 화상(畵商)이었던 테오는 형의 재능을 믿고 금전적인 후원을 계속했다. 고흐가 37살의 나이에 권총 자살한 뒤 다음 해 테오도 34살에 병사했다.” “골목길 연가”에서 가장 좋은 느낌을 받았던 에피소드는 세 번째 이야기인 화가 타츠미와 그의 애인이자 매니저였던 히나코의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같은 전공을 택해 미술의 길을 갔던 이 둘은 타츠미는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해 화가로, 히나코는 도쿄학예대학에 입학해 미술론을 전공해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화가로서 대성할 기미를 보였던 타츠미는 어찌된 일인지 졸업 후 교토로 돌아와 나가야에 틀어박혀 백수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히나코는 마치 매니저처럼 그의 생활을 챙겨주고 관리해준다. 타츠미에게 히나코는 영감을 주는 존재이자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자였고 히나코 자신도 타츠미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유능한 화상(畵商)을 만나 타츠미의 그림에 대해 평가를 받은 후 그의 미래를 위해 그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히나코가 떠난 후 타츠미는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 폐인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깊은 동굴 속에 웅크리듯 외출도, 음식도, 타인과의 교류도 일절 끊어버린 타츠미는 나가야의 허름한 벽에 아름다운 히나코의 나신을 그리고 지쳐 쓰러진다. 3년이 지난 후 히나코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이 망가져 있었고, 타츠미는 천재성에 빛을 발해 이젠 ‘제법 잘 팔리는 화가’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엔 작가가 마련해놓은 애잔한 여운이 남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오, 이거 아주, 귀엽네요, 솔직하고 구김이라곤 없는 작품에, 기술도 빼어나고, 아주 잘 그렸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불경기 여파로 요즘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당연히 이쪽 업계도 다들 구매를 미루고 있고요, 그럼에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그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이 사랑이든 미움이든, 혼돈이든 고요든, 손님들이 원하는 건 바로 거기에 있어요, 티스푼 하나 정도의 광기, 모든 것을 다 채운 그림은 재미가 없어요, 그래요, ‘3년 후에 다시 오라’ 그에게 그렇게 전해주시겠어요?” “골목길 연가”의 장점은 장인(匠人)들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코하루의 책 만들기나 미츠오의 은세공 작업, 타츠미의 그림과 미술계의 사정, 이자와와 나오미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일본 문학계의 이야기와 천재 문인들이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 아사미의 양초를 만드는 일과 그로 인해 생기는 ‘불빛’의 은은한 아름다움 등등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예술의 멋’이 느껴지는 사랑이야기여서 이 작품이 좋았던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예술가들의 사랑은 어딘지 모르게 남다른 구석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내게서 그림을 빼앗아 놓고서 여기서 끝낸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만 생각하다, 망가지면 좋겠어.”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애잔하고 독특하게 보여준 “골목길 연가”를 가을 날 무언가 안 좋은 얼굴로 우울해져있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