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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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U

“1999년, 90의 9년, 7의 달,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 전후의 기간, 마르스는 정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 「미셸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서」” 신비롭고 철학적인 세계관이 깊이 있게 녹아있는 스토...

2011-11-21 유호연
“1999년, 90의 9년, 7의 달,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 전후의 기간, 마르스는 정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 「미셸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서」” 신비롭고 철학적인 세계관이 깊이 있게 녹아있는 스토리를 엄청난 작화실력과 유려한 연출로 결합시켜, ‘만화’라는 장르를 가히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천재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신작 “SARU”를 들고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만화 애호가들까지 충격에 빠뜨린 대표작 “마녀”부터, 단편집 “영혼”, 토호쿠 지방에서 작가가 직접 겪은 전원생활을 토대로 그렸다는 “리틀 포레스트”, 판타지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근작 “해수의 아이” 까지, 이미 국내에도 대부분의 작품들이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되어 단단한 마니아층을 구축한 작가이기도 한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이번에 들고 온 신작 “SARU”는, 한 줄로 설명한다면 ‘이가라시 스타일로 해석한 멸망에 관한 묵시록’이다. “그렇구나! 나도 너를 알고 있다. 너는 교회가 ‘악마’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실체가 없는 지적 생명체 중 하나....! 스스로 이름을 대고 우리에게 존재를 드러내라!” “SARU”란, 일본어로 “원숭이”를 뜻한다. “원숭이”라는 키워드가 이 작품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는, 이 작품 속에서 “원숭이”란 바로 중국의 고전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머나먼 천축까지 호위하는 세 요괴 중의 하나이자,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의봉으로 강력한 요괴들을 모두 쓰러트리며, 때론 분신술을 비롯한 수많은 마법까지 구사하는, 말 그대로 동양의 슈퍼히어로 같은 캐릭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창조한 “손오공”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거대한 힘의 ‘상징’이자 ‘실체’이며, 노스트라다무스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존재’로 예언한 ‘앙골모아의 대왕’이기도 하다. “너희들은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나를 무수한 이름으로 멋대로 불러대지....나는 ‘하루만타’라 불린다. 나는 ‘틀랄록’이라 불린다. 나는 ‘투니아쿠르크’라 불린다. 나는 ‘두나 외’, 나는 ‘내장을 드러내는 자’, 나는 ‘하누만’, 나는 ‘토트’, 나는 ‘헤르메스’.... 그리고 이렇게도 불리지. 나는 ‘동승신주(東勝神洲) 오래국(傲來國) 화과산(華果山)에서 태어난, 수렴동(水簾洞)의 주인이며 천생성인(天生聖人)이자 미후왕(美?王)’,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 아니...‘우리는’, 이라고 해야 하려나?” “SARU”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다양한 신화와 그 뒤에 따라붙는 불가사의한 전설들을 ‘손오공’과 ‘엑소시스트’라는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절묘하게 엮어서, 어떤 때는 세계를 파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창조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힘이자 진리’를 갖춘 어떤 ‘근원적인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원래 이 작품은 일본의 유명 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와 공동기획으로 시작된 작품으로 ‘손오공’과 ‘엑소시스트’라는 전혀 접점이 없는 두 가지 소재만을 공유하면서 소설과 만화를 동시에 창작하기로 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한국어판 발행을 담당한 출판사 애니북스의 소개글을 일부 발췌하면, “『마녀』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화풍과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연상시키는?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최신작 『SARU』가 출간됐다. ‘SARU’란 일본어로 ‘원숭이’를 뜻하며『서유기』의 손오공을 소재로 세기말적 종말론에 관해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일본에서는 예외적으로 잡지연재가 아닌 단행본으로 기획되었으며 이 작품을 위해『해수의 아이』의 연재를 거의 1년간 쉬는 모험까지 감행하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만큼?저자의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손오공’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두고?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그렇게 탈고한 이사카 코타로의 『SOS 원숭이』(랜덤하우스 코리아 발간)와?이가라시 다이스케의『SARU』는 같은 소재와 기획,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서로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한다.『SARU』는 실제로 있었던 1626년 명나라 자금성 폭발사고,?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에 떨어진 운석,?1982년 포클랜드 전쟁,?손오공이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소재를 하나로 묶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인류멸망에 관한 종말론을?새롭게 구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소설 “SOS원숭이”를 집필한 이사카 코타로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들을 보유한 일본의 인기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마왕”, “중력 삐에로”, “그래스호퍼”, “골든슬럼버” 등의 작품들이 있으며 특유의 문체와 재기 넘치는 스토리로 영화나 만화로 각색된 작품이 아주 많은 작가다. (“마왕”, “그래스호퍼”, “종말의 바보”같은 작품은 만화로 각색,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되어 완결되었다) “다시 말해 헤르메스란....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수많은 비범한 능력을 갖춘...위대한 원숭이, 이건 그야말로 ‘제천대성 손오공’ 그 자체가 아닐까요?...(중략)... 초현실적인 힘을 가진 원숭이의 전설은 사실 세계각지에 퍼져 있더군요. 예를 들면 일레느가 말한 ‘틀랄록’은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비와 번개의 신, ‘두나 외’는 영국 맨 섬에 전해지는 날씨의 정령, ‘하누만’은 인도 신화에 전해지는 바람신의 화신, ‘하루만타’는 티벳이죠, 모두 날씨와 관계가 있고, 원숭이 같은 모습이에요, ‘내장을 드러내는 자’라는 건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이건 과연 우연일까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멀리 떨어진 완전히 다른 문화에 공통된 전승이 있다니, 인간의 모습과 닮은 동물에 애착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문화를 불문하고 인류에게 공통된 감각일지도 모르지만...그래도 만약, 그런 원숭이가 과거에 실존했다면? 물론 원숭이 자체는 아닐지도 몰라요, 원숭이로 보이는 모습을 한 초현실적인 존재가...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문명권의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면? 그 기억이 전해 내려와... 남미에서는 창세신화의 토대가 되고, 유럽에서는 헤르메스의 전설과 이어지고...동아시아에서는 위대한 승려의 전기에 흡수되어, ‘서유기’를 낳았다....” 단 2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SARU”는 ‘대작의 풍모’를 독자들 앞에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제는 거의 표현의 정점에 다다른 듯한,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의 성당벽화를 보듯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그림과 어지간한 미스터리 소설 두 세권에 깊이 있는 종교서, 역사서, 철학서를 합쳐놓은 것 같은 탄탄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거기에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만화’로서 결합시켜 구성해놓은 절묘한 연출법.... 이가라시 다이스케를 모르는 독자들이라도 한 번 읽어본다면 단숨에 그의 팬이 될법한 에너지를 박력 있게 내뿜고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마녀”의 “묵시록”버전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두 작품의 세계관이 비슷했으나, ‘세상의 비밀을 지닌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함축적이고 깔끔한 스타일의 옴니버스로 그려낸 “마녀”에 비해, “SARU”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번뜩이던 천재성이 시간과 경험을 통해 깊고 단단하게 숙성되어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게 된, 장편의 무게감과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 관록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