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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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레이디

“햇빛에 짓눌려 머리가 지끈대던 날에도 마음은 얼음주머니를 끌어안은 양 추웠다. 어딘지 썰렁하고 허전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지 않을 때는 뱃속이 미어터지도록 술과 안주를 밀어넣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응원하는 야구팀은 매일 밤 새롭게 지는 법을 궁리하는 것만 ...

2011-11-11 유호연
“햇빛에 짓눌려 머리가 지끈대던 날에도 마음은 얼음주머니를 끌어안은 양 추웠다. 어딘지 썰렁하고 허전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지 않을 때는 뱃속이 미어터지도록 술과 안주를 밀어넣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응원하는 야구팀은 매일 밤 새롭게 지는 법을 궁리하는 것만 같고 사회생활 3년째에 우리는 아무도 차 한 대 갖지 못했고 재빠르고 똘똘하게 자기 자리 찾아 눌러앉지도 못하고 발은 붓고 화장은 들뜨고 하루 종일 찔끔찔끔 흘렸던 땀에 기분 나쁘고 휴대폰마저 내 소비생활을 비난하는 것 같고 세상에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다.” “파한집”으로 자신의 색깔과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낸 순정만화가 윤지운의 신작 “안티레이디”는 스물여섯의 나이로 즐겁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괄괄하고 솔직한 여자 정이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맨틱 코미디다. 사실 나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판타지 같은 해피앤딩에 모든 것을 맞춘 이야기 같아서인데, “과정이 어찌됐든,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라는, 너무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이야기 방식인 것 같아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과 인연이 결말이 미리 정해져있다면 너무 재미없진 않을까? 같은 운명론적인 관점이나, 어떻게 사랑의 결말은 모두 아름다워야만 하나? 같은 시니컬한 관점도 분명히 작용했겠지만, 아마도 제일 싫었던 점은 모든 결말을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는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강제적인 법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힘들고 괴로운 만큼, 비극적이다 못해 참혹하기까지 한 인연과 만남, 이별이 세상에 넘쳐날수록, 사람들의 차갑게 무뎌진 가슴을 조금이라도 녹여줄,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행복이 넘치는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세상의 온기를 조금씩이라도 높여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판타지”라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아주 간절한 모두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믿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약 같은 거라고 말이다. “과장, 35세, 직장후배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오너가 고용해준 거라고 생각하는 듯, 후배 갈구는 스킬을 세련되고 주의 깊게 다듬어 온 경력이 10년, 어설프게 감정으로 덤비다 쪽박차느니 속이 썩고 디비져도 참는 편이 낫다. 이 질질 끄는 말투의 통통한 아가씨는 7개월차 후배, 가장 큰 특징이라면 두부뇌를 장착하고 계신다. 근로자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쥐고 흔드는 자, 오너, 차라리 날 잘라라!! 운명이려니 하고 쫓겨나마!! ...올해만 채우자, 올해만, 3년 채우면 경력직으로 이직도 쉬울테니까” 그런데, 사실 내가 볼 때 “안티레이디”는, 아무리 봐도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다. 그 장르의 작법과 구조를 아주 충실히 따르고는 있지만, 책을 발간한 서울문화사 편집부에서 “언어유희의 달인 윤지운 작가의 시니컬한 명대사 가득한 로맨틱 코미디”라고 친절한 소개를 해주곤 있지만, 3권까지 나온 현 시점에서 정독하고 판단한 바로는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로맨틱 코미디”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떤 장르를 특정 짓는 강력한 기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정해보라고 한다면,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스물여섯 아가씨의 현재진행형 성장기”라고 “오너의 후배, 일하기 싫어하는 오너가 반년 전 어디선가 데려왔는데 저 대머리 돼지가 한 일 중 가장 쓸 만한 일이었다. 사람 싹싹하고 일 바지런히 잘하고 커피셔틀도 잘 해주고 다 좋은데, 눈치가 없다, 화를 내도 왜 화내는지조차 모르는 눈치니 화내기도 뭣하고, 눈치 없는 것도 병이야! 돈 주고 고칠 수 있는 거면 내 돈이라도 퍼붓겠다!!” “안티레이디”의 1권은 느낌이 아주 좋다. 깔깔해서 목에 걸리는 느낌의, 조금은 슬퍼지는 주인공의 독백과 함께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야구장에서 시작되는 자연스럽고 인상적인 도입부, 직장생활의 애환을 한 번에 드러내주면서도 아주 리얼하고 스무드하게 앞으로 등장할 캐릭터들을 독자들에게 소개시키는 연출, 그리고 주인공에게 가시처럼 목에 박힌 대학시절 첫사랑을 동창 결혼식에서 마주치게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세련된 방식 등 마치 강물이 흐르듯 유려하게, 읽는 이에게 피로감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편집부에서도 대놓고 극찬한 “윤지운의 대사빨”에 있다. 여성 작가가 구사했다고 하기엔 안 믿어질 정도로 리얼하고 거침없는 재밌는 대사에 가끔씩 주인공의 아프고 속상한 기분을 읽는 이가 절실하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여운이 남는 독백들, 그림과 스토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돋보이게 만들어주면서도 ‘식자’로만 존재하는 이 강력한 “초식”은 순정만화라면 질색을 하는 남자독자들도 무척이나 재밌게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한 학번 위인 승주 선배를 처음 만난 건 더 이상 학교생활에 어떤 기대도 새로움도 없던 3학년 때였다. 일찍 군대에 갔다가 2학년에 복학했던 선배는 다른 복학생들의 조급함이나 어색함이나 그 와중에 나타나는 각잡힌 긴장이 전혀 없는 여유롭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신입생 시절에도 가져본 적 없는 두근거림, 설렘, 그런 것으로 가득했던 내 대학생활의 후반은 가히 ‘삽질의 역사’라고 이름 붙여야 마땅할, 그런 것이었다.” 이 작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건 첫 번째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의 유려한 분위기’, 두 번째는 ‘재밌고 톡톡 튀며 날아다니다가 한 순간 사람의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대사와 독백들’, 세 번째는 ‘너무 리얼해서 애잔할 정도의 사회생활에 힘들어 하는 직장인들에 대한 묘사’ 였다. 위의 세 가지 이유 말고도 이 작품의 좋은 점을 들라면 더 들 수 있겠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한 번 책을 잡고, 표지를 넘기고, 한 장 한 장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할 때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마지막 장을 덮게 되는 것,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권을 집게 되는 것, 만약 다음 권이 아직 안나와있다면 다음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것, 그것이 잘 만들어진 이야기의 표상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한다. 여자고 남자고 주인공과 같은 또래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재미있고 인상적인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