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거야?! 왜 죽였어! 대답해! 너, 이 일의 방식을 알고는 있는 거냐?! 일단 우리 같은 중개업자가 살인 의뢰를 받으면, 너처럼 일을 못 맡아서 허탕치는 킬러를 고용해서 파견하는 거야! 의뢰인을 죽이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호칭도 없는 햇병아리라고 해서 용납되는 실수가 아니란 말이다! 의뢰금도 착수금밖에 못 받았는데...!”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낯익은 소년이, 정면을 향해 칼을 든 채로, 강렬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쏘아보는 그림의 책 표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표지만으로도 무언가 아우라가 느껴져서,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현재 나와 있는 한국어판 3권까지 바로 사버렸다. 방금 구입한 책을 들고, 서점 바로 옆 커피숖 테라스에 앉아서,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바로 비닐포장을 뜯었다. 재미있었다. 강력한 여운을 주었다. 다음 권이 무지하게 궁금했다. 정말 순식간에 3권을 다 읽었다. 다 읽고서 담배 한 가치 피워 물었더니 아이스커피가 담긴 예쁜 유리잔에 가득 차있던 얼음들이 다 녹아있었다. 아, 여름이었지, 엄청 더운 날씨였구나, 그걸 몰랐네... 이것이, 내가 “왈츠”라는 만화를 알게 된, 대략 한 시간정도의 상황과 느낌이었다. “잭 크리스핀이 말하길, 인생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는, 예의다.” 책 표지에서부터 느껴진 친숙함의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작품의 원작자가 이사카 코타로(Isaka kotaro), 작화가가 오스가 메구미(Osuga megumi)였다. 1권 작가의 말 코너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번 주인공은 <마왕 ~ JUVENILE REMIX~>로부터 4년 전의 세미입니다. ‘마왕, 알아요’ 라는 분,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서 내가 표지만 보고도 그런 친숙함을 느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자인 이사카 코타로는 한국에도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의 젊은 소설가다. 1971년생으로 2004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2005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소설 “오듀본의 기도”로 데뷔했다. 그의 힛트작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많은데,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는 대표작 “마왕”을 비롯해, “중력 피에로”, “칠드런”, “골든 슬럼버”, “사신 치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그래스호퍼” 등이 있다. “유쾌한 상상력에 기반을 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나있는 그의 작품들은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적인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바탕으로 만화로 각색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지곤 했으며, 기발한 상상력과 정교한 구성, 재치 넘치는 대화로 평단은 물론, 젊은 세대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 무려 여덟 편의 작품이 영화화됐으며, “그래스호퍼”, “마왕”을 비롯한 다섯 작품이 만화로 만들어졌고, 그 외 다수가 연극, TV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로 재탄생되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화가인 오스가 메구미는 이사카 코타로의 “마왕”을 만화로 각색한 만화가로 만화 각색판의 제목이 “마왕 ~ JUVENILE REMIX~”라 명명될 만큼, 원작소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만화만의 재미와 장점을 살려 각색함으로써, “소설원작보다 만화가 더 낫다”는 보기 드문 평가를 이끌어낸 만화가라 하겠다. “잭 크리스핀이 말하길, 일과 여자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다른 녀석들이 아니다. 나다.” 이 작가나 이 작품, 또는 이 주인공들이 낯선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세미는 ‘남에게 이름이 불린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가출 청소년으로 직업은 킬러다. 무기는 칼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엄청나게 잔인하지만 그의 잔인함에는 서글픈 이유가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인 이와니시는 세미에게 세미(매미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여준 중년남자로 세미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다고 주장하는 매니저지만 실상은 살인청부를 중개하는 중개업자다. 가장 기본적인 선악의 개념은 물론 이 세상의 윤리나 도덕 같은 개념이 전혀 없는, 심플한 소년 킬러 세미와 세상의 어둡고 더러운 부분은 거의 다 겪어 약삭빠르고 치사한 정도가 거의 최강을 달리는 중년남자 이와니시의 콤비플레이가 이야기의 진행에 맞추어 문득문득 읽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의 개성이 세상의 부조리함에 부딪혔을 때 발생하는 절묘함에서부터 나온다. “나는 이와니시, 표적은 그 이마빡에 문신이 있는 놈들의 잔당, 전원이다. 의뢰의 보수는 너의 매니지먼트, 내가 너를 돈 잘 버는 프로로 만들어 주지, 어때...? 세미(蟬)” 주인공인 세미는 비정하고 차가운 도시에 어미도 없이 내던져진 어린 살쾡이 같은 존재다. 그는 그저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애정에 굶주려 있는 작고 가여운 새끼 짐승이다. 그러나 타고난 본성이 맹수라서 무언가를 사냥하고 죽여서 먹이를 얻어야하는 육식동물의 슬픈 운명을 지닌 짐승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생각은 “약한 것은 죽는다. 그건 당연하다”라는 가치관이다. 그런 세미가 그저 시끄럽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세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이 살자고 세미를 서슴없이 적들의 소굴에 내던지며, 실상은 돈만 밝히는 주제에 입으로는 그럴듯한 충고나 조언 따위를 해대는 이와니시의 곁을 떠나질 못한다. 마치 악마에게 길들여지는 맹수새끼처럼, 그 둘의 관계는 어떤 때는 사이 나쁜 부자(父子)지간처럼, 어떤 때는 호흡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먹이를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애완동물처럼, 어떤 때는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의 가치관이 양 극단을 달리는 이 둘이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좀 미안하네, 목숨을 빼앗을 때 느끼는 죄책감은 그 정도다. 인간은 동물을 죽여서 먹으며 살아간다. 나는 사람을 죽여서 돈을 받아 살아간다. 똑같은 거잖아? 먹이사슬이라는 거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재밌고, 강렬하며,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시간이 남는다면 연관 작품인 “마왕 ~ JUVENILE REMIX~”(전 10권 완결)이나 같은 원작자의 소설을 또 다른 만화가가 각색한 만화 “그래스호퍼”(전 3권 완결)를 읽어보면 주인공인 세미와 이와니시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