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를 따긴 했지만 연구기관, 대학교원, 공무원에 계속 떨어지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려고 해도 대불황의 파도, 다카스기 하루미, 벼랑 끝에 내몰린 31세.” 훈훈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드는 일본 만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은 “다카스기家의 도시락”, 31세 노총각 오빠와 12세 중학생 여동생이 어색하고 신기하게 엮어가는, 사촌남매의 동거생활을 다룬 요리 만화로, 제목이나 표지에서 풍기는 평범함과 다르게,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정확하게는 ‘미성년 후견인’입니다.. 돌아가신 미야 씨의 유언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딸인 쿠루리를 하루미씨에게 맡겨줬으면 한다고.” 주인공인 다카스기 하루미는 31세의 독신남, 대학에서 지리학에 관해 연구하며 박사학위까지 땄지만, 대학의 조교자리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해 아직까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반(半)실업자 신세인, 조용하고 소심한 남자다. 어릴 적 아버지와 15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미야 고모와 한집에 살면서 친남매처럼 지냈으나, 고3 겨울 미야 고모를 역으로 데리러가다가 부모님이 두 분 다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불행을 겪는다. 그 사고를 자기 탓으로 여긴 미야 고모는 ‘미안해, 하루, 내 탓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고, 그 후 ‘가족이 안개처럼 사라진 13년’을 홀로 보냈다. 여자 주인공이자 이 작품의 마스코트인 다카스기 쿠루리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던 엄마의 피를 이어받아 12살 같지 않은 미모를 갖춘 여중생으로, 싱글맘으로 자신을 키워왔던 엄마와의 둘만의 생활이 12년 인생의 전부였던 탓에 남을 대하는 것이 매우 서툴고, 속마음을 잘 내비치지 않는, 조금은 슬퍼 보이는 여자아이다. 사촌 남매간이지만, 미야의 변호사를 통해 처음 만난 생소한 두 사람은, 미야의 유언에 의해 어색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다소 불편하고 서로간의 오해도 발생하지만, 한발 한발 천천히 서로에게 소중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가족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갑자기 생각났다. 미야 누나가 도시락을 만들어주던 시절, 하나하나에 여러 가지 마음이 담겨있었겠지, 그런데도...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먹기만 했었지, 아마도 미야 누나는 쓸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13년간 미야 누나가 쿠루리와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동안 나는 세계 각지의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느끼며 사람과 환경과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학문을 배우고 논문도 쓰고 학회발표도 했어, 느끼고 생각하고 전하는 걸 배웠지,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이야 말로....” 이 어색한 동거생활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어떤 때는 하루미가, 어떤 때는 쿠루리가 서로를 위해 선물하는 ‘도시락’이다. 첫 화에 등장하는 ‘우엉조림’은, 빈 도시락 통을 흔들어보며 미소 짓는 쿠루리의 표정을 통해, 하루가, 그리웠던 미야 고모를 떠올리고, ‘이 느낌이 가족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끝을 맺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요리가 합쳐지는 세련된 연출방식으로 매 에피소드마다 읽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준다. “가족이라는 것의 역할분담에서 생각해보면 이쪽의 역할은 일단 보호자이다. 쿠루리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집안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활면에서 이쪽이 서포트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다만, 식단 짜기와 조리는 둘이 비슷한 수준인 듯하다. 하지만 스킬 업을 하고 싶어 하는 정열로 봐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따라 잡힐 것 같다. 보호자라는 의식을 충족시켜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할 텐데....” 이 만화가 아주 잘 만들어진 만화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읽으면서 받는데 있다. 아무리 캐릭터가 훌륭해도, 아무리 세계관이 뛰어나도 그것을 이어주는 ‘매끄러운 연결법’이 없으면 읽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아주 균형이 잘 잡혀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캐릭터의 기본 설정만 잡아놓은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어색한 만남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서로간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도시락’으로 매개를 삼아 발전시킨다. 그러면서 천천히, 매 회마다 캐릭터들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어 스스로 성장해나가면서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자리 잡게 만드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기법을 쓴다. 동네에서 자주 이용하는 단골슈퍼의 반액세일이나 특가세일을 너무나 좋아하는 쿠루리의 모습이라든가, 쿠루리의 건강과 기쁨을 위해 지리학 연구를 하면서 배웠던 정보를 활용해 유기농 식재료를 구해오는 하루의 모습이라든가, 평범하고 소박한 연구원인줄 알았더니 홋카이도에서 엄청 크고 유명한 수산물 도매상의 딸인 코사카라든가 하는, 전반적인 캐릭터의 소개를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러우면서도, 점진적으로 성장시켜나가는 방식이 이 작품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핵심적인 툴(tool)이다. “내가 생각한 거지만 도시락은 좋은 선택이다. 쿠루리와 비슷한 수준의 요리 레벨에 보호자 느낌 충만한 아이템, 그리고 만드는 건 반찬계의 대스타에다 기본인 햄버그 스테이크, 미야 누나도 잘 만든다고 말했으니까 분명히 쿠루리도 먹어봤을 거야, 게다가 중학교 때 요리실습 시간에 만들어본 적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요리만화가,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미스터 초밥왕 전국대회편”이나 “신의 물방울”같은 스타일이었다. 요리 하나 만드는데 무슨 생명을 걸고 온 영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는 너무 과장되게 표현된 장인정신, 너무 화려하게 수식어를 달아놓아서 도대체 무슨 맛인지 짐작조차 안가는 맛에 대한 설명,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거대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어깨에 힘들어간 캐릭터들 등등 내가 싫어하는 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요리 만화인 “심야식당”이나 “맛 일번지”같은 스타일들은 잘 만들어진 요리가 사람에게 주는 행복한 느낌과 먹었을 때의 감동 같은 것을 드라마를 통해 아주 잘 전달해주는 작품들이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담담한 이야기를 통해 요리를 부각시켜주는 연출법, 난 그런 요리만화가 좋다. “다카스기家의 도시락”을 통해 다른 분들도 이런 느낌을 가지실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