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가와 대교아래에서 상행열차하고 하행열차가 스쳐가는 동안 큰 소리로 소원을 3번 외치는데, 그 목소리가 열차에 묻히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작년부터 유행하고 있거든요.” 무라카미 카츠라 : 대학 재학 중인 1997년에 소학관의 제 71회 스피리츠상에 응모하여 준스피리츠상 수상으로 데뷔, 단편을 발표한 후, “빅 코믹 스피릿츠”에 “사유리 1호”, 그리고 “CUE”가 연재됨, 최신작은 “월간! 스피리츠”에 창간호부터 연재되고 있는 “요도가와 컨베이어벨트 걸”,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한 시선을 앞세워 작품 중엔 여자 주인공이 많으며, 오사카의 요도가와 강변을 특히 좋아한다. “난 오늘 16살이 되었다.” 나에겐 다소 낯설고 생소한 작가인 ‘무라카미 카츠라’라는 일본 작가의 “요도가와 컨베이어벨트 걸”을 사게 된 건, 순전히 독특한 느낌의 표지 때문이었다. 아주 촌스러운 느낌의(물론 편집부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반짝거리는 핑크색 표지에 귀여운 여자 아이 그림 하나만 덜렁 그려져 있는 한국어판의 표지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강렬한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책 내용에 대한 설명도 일체 되어있지 않은, 이 유치한 느낌의 책을 사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이런 우연한 만남이 생각지도 않은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은 살아가기 재미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 같이, 유부를 만들고 있습니다. 4월이면 이곳에 입주해서 일하게 된지 1년이 됩니다. 가끔 내 또래 아이도 들어오지만, 사정이 있는지 오래 있지 않아서, 지금은, 내가 유일한 젊은 직원입니다. 컨베이어에서, 난 보통 가운데에서 일합니다. 선두에 서는 사람은 참 대단해요, 컨베이어를 죽이고 살리는 건 선두그룹에 달려있다고 하거든요, 마지막 파트는 요새인 셈이죠, 손이 빠른 사람이 아니면 끝은 못 맡긴다고 공장장이 했었습니다. 하지만....여기서도 밝은 얘기는 듣기 힘듭니다.” 맑고 순수한 느낌의 호기심 많은 16세 소녀 카요와 겉으로는 쿨하고 시원 시원해보이지만 사실은 한없이 여린 가슴을 지닌 동갑내기 소녀 나코의 독특한 우정을 다룬 작품으로 설정부터가 매우 유니크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카요는 사정이 있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오사카의 유부공장에 취직, 사원기숙사에 머물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소녀다. 귀엽고 깜찍한 외모의 카요는 그 타고난 성실함과 착한 마음씨 때문에 같이 일하는 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정작 16살이 된 카요에게는 ‘나이가 비슷하고, 옷 얘기 남자친구 얘기 같은 거 할 수 있고, 우메다에서 쇼핑도 할 수 있고, 저 빨간 관람차도 같이 타고...’ 싶은 또래의 친구를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나코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지역의 명문고에 수석입학을 하게 되면서 청춘이 꼬여버린, 그래서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가식적으로 변해버린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성숙한 느낌을 풍기는 여고생이다. 우연한 기회에 카요가 일하는 유부공장에 나코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들어오게 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고 이 작품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많은 사람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되는 것뿐이야, 공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연이 많거든.....” 대개 이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순정만화들은 조금 더 달콤하고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케이스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그림이나 대사는 굉장히 감수성이 충만하고 따뜻한 느낌인데, 정작 이야기 자체는 요즘 현실의 각박함이나 잔인할 정도로 냉혹한 여고생들의 인간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림이나 연출, 대사 같은 만화의 세부요소들과 큰 틀이 되는 스토리가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묘하게도, 완전히 상극처럼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과 차가운 느낌이 흐름 속에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읽는 이를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차갑고 어두운 현실을 만화로 풀어낸 것은 분명한데, 따뜻한 느낌의 캐릭터나 애잔한 느낌의 대사나 상황들이 그것을 희석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극의 요소들이 서로 부딪쳐 모든 것이 상쇄되어 버린 그 한가운데에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묵직하고 뭉클한 주제나 말들이 뚜렷하게 남는다. “친구를 원해요!! 친구를, 주세요!! 나이가 비슷하고, 옷 얘기 남자친구 얘기 같은 거 할 수 있고, 그리고, .... ‘친구’하면, 제일 먼저 나를 떠올리고, 나도, 그 친구를 제일 먼저....” 아주 독특한 캐릭터와 신선한 스토리로 촘촘히 짜여있는 “요도가와 컨베이어벨트 걸”은 현재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아주 유려하고 매끄러운 것이 이 작가의 장점인 것 같다. ‘관계’라는, 다소 무겁고 칙칙한 주제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저 카요나 나코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중간 중간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을 살면서 잊고 살았던, 작지만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 그래서 나에게도 있었던 빛나던 청춘의 느낌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들 말이다. “신 같은 거 안 믿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신 말고 나한테 말해, 딱 한 번만, 우메다에서 살 수 있는 걸로, 너 오늘 생일이잖아?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난 16살 때 무슨 소원을 빌었지?’라는 거였다. 그런데 웃긴 것은,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도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카요처럼 ‘친구’가 갖고 싶었을 수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이루어지길 그 무렵의 나도 간절히 원했을 텐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슬프고 씁쓸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난, 이 작품을 재미있고 따뜻하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꿈이 사라져버린,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대하지도 않는, 나 아닌 누군가를 ‘믿어 보자’ 따위의 경솔한 감정은 더더욱 갖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