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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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고 달콤한

“에다 마키(28), 광고회사 기획영업부에 다니는 커리어 우먼,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상사조차 경의를 표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실은 재즈나 오후의 차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고 남자와도 메가톤급으로 인연이 없었다.” ‘일본산(産) 요리만화’는 날이 갈수록,...

2011-10-14 석재정
“에다 마키(28), 광고회사 기획영업부에 다니는 커리어 우먼,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상사조차 경의를 표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실은 재즈나 오후의 차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고 남자와도 메가톤급으로 인연이 없었다.” ‘일본산(産) 요리만화’는 날이 갈수록, 그 형식과 소재에 있어서 꾸준히 변화를 추구하면서,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인기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최근작 “어제 뭐 먹었어?”(삼양출판사, 한국어판으로 현재 4권까지 출시)같은 경우, ‘변호사와 미용사’ 게이 커플이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풍경들을 큰 줄거리로 잡아 다양한 일본식 가정요리들과 아주 세심하게 정리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고, 신문사 기자들을 통해 숨겨진 “일본의 모든 맛”을 찾아낸다는 기획 아래 장장 105권(현재 출간되어있는 최신 한국어 판, 대원씨아이)이나 출간되어 있는 “맛의 달인”만 보더라도 일본에서 “요리 만화”라는 장르는 엄청난 시장성과 확장성을 가진 소재임을 알 수 있다. 요즘에 인상 깊게 본 ‘일본산(産) 요리만화’ 중에서 “현미선생의 도시락”(대원 씨아이, 한국어판으로 현재 6권까지 출시)과 “심야식당”(대원 씨아이, 한국어판으로 현재 7권까지 출시)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현미선생의 도시락”같은 경우, ‘요리만화의 정석’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는데, 대학 농학부 강사로 재직 중인 겐마이 유키가 제자, 친구들과 함께 단순한 요리소개뿐만이 아니라 재료, 재배법, 건강, 음용법 등등 더 나아가 환경문제까지 거론하는 말 그대로 “웰 메이드” 요리만화였다. “심야식당”의 경우는 이미 일본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상품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요즈음 우리나라 방송계나 실제 식당들에서도 이 만화의 컨셉 중 많은 부분을 차용해 다양하게 써먹을 정도로 ‘스타일과 스토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만화’라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요즘 ‘일본산(産) 요리만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요리소개(정보)와 드라마의 결합”이다. 서로 잘 맞지 않아 보이는 이 두 가지 장르가 절묘하게 결합되면 결합될수록 작품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인정받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기획과 편집방식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요리만화의 경우도 허영만 작가의 “식객”(김영사, 전 27권)이 성공함으로서 이 방식이 현재의 대세라는 증명이 되었다.) “천만에, 살아가기 위한 자산은 무엇보다 몸이야,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인간이 뭘 할 수 있겠어? 게다가 건강보조제란 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한 조연일 뿐 그 자체가 주가 되진 못해, 연애도 똑같아, 예쁘고 일 잘하는 건 그저 곁가지에 불과하고, 제일 중요한 건 주인공인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거야, 어젯밤 당신은 아주 생기가 넘쳤어, 남자친구 앞에서도 그렇게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아, 남자친구가 보고 싶어 하는 건 자기만 아는 일면이니까, 음식을 못한다고 하면 같이 만들어줬을지도 몰라,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그 정도 응석쯤은 저절로 부리게 되는 법이잖아, 게다가 연인이 직접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고, 집에 가보고 싶은 건 누구나 당연한 거야, 결국 유치하고 제멋대로인 건 당신이라구.” 여기에 소개하는 “씁쓸하고 달콤한”은, 요즘 대세에 맞게 작품의 기획과 편집방식을 유행하는 트랜드에 맞추어 철저히 지키면서, 독자층의 주요 타겟으로 삼은 미혼 직장 여성들의 구미에 딱 맞게 제작된, 전형적인 “요즈음의 일본산(産) 요리만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요 컨셉은 “미남 채식주의자이면서 요리까지 잘하는 게이 미술교사”와 “겉으로는 화려하고 능력 있지만 사실은 건어물녀인 스트레이트 광고회사 OL”의 동거생활이다. 여자에게 아무런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미남 게이와 아름답고 능력은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남자’가 없었던 외로운 여자가 한 지붕아래서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소하면서도 재밌는 동거생활 일지인 것이다. 사회적인 인연으로는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이 평행선 같은 커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이자,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또 어떤 때는 가족처럼 지내게 되는 이유는 바로 “요리”에 있다. 이 만화에서 주요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과 사랑이 담긴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 건강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는 없던 정(情)도 생긴다는 것”이다. “우연히 채식주의자인 꽃미남 고등학교 교사 카타야마 나기사와 알게 된 후, 약점(게이란 사실)을 잡고 학생들한테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해 동거 생활을 달성한 에다 마키(28), 멋지고 잘생긴 그의 집이라면 훨씬 더 근사하리란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이사를 했으나 그의 집은 다름 아닌....” “씁쓸하고 달콤한”이 잘 만들어진 만화라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아주 유연하고 잔잔하면서도 읽는 이를 빠져들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첫 번째, 개성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들이 마구 등장한다는 것이 두 번째, 세심한 연출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결합된 정보(요리소개, 레시피 등)와 드라마가 세 번째다. 아직 한국어판으로는 1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대원 씨아이), 1권의 분량 안에 이렇게 잘 정리된 스토리, 캐릭터, 연출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권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사실 만화를 만들 때 가장 힘든 부분인데 그 유려함과 세련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주인공인 나기사와 마키의 에피소드가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매력적인 조연들도 아주 괜찮다. 둘 사이를 연결해준 중매인이자 중재자 역할의 게이 바의 마스터나, 나기사가 푹 빠져있는 유기농 채소 농장의 주인이자 마키의 아버지인 에다 미사오, 나기사의 형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누었던 탤런트 아오이 미나미 같은 조연들은 그 개성이 너무나 강렬해 앞으로의 스토리 구성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비중 있는 조연들이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한 여름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입맛 없는 요즘, “씁쓸하고 달콤한”을 읽고 나니, 여기에 소개된 맛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보거나 만나본지 오래되어 소원해진 친구와 진솔한 저녁식사 한 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