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
“내 생애 처음 봤던 영화는 5살 때… 옆집 극장에서 료지 오빠와 함께 몰래 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관객들의, 미소를 배웅하는 게 좋았다. 항구의 바람이 부는 낡은 상가의 작은 극장은, 오랫동안 나의 보물 상자였다.” “Flower”의 작가 와다 나오코의 신...
2011-10-11
유호연
“내 생애 처음 봤던 영화는 5살 때… 옆집 극장에서 료지 오빠와 함께 몰래 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관객들의, 미소를 배웅하는 게 좋았다. 항구의 바람이 부는 낡은 상가의 작은 극장은, 오랫동안 나의 보물 상자였다.” “Flower”의 작가 와다 나오코의 신작 “치카라”의 발매에 맞추어, 단편집 “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가 한국어 판으로 발간되었다. 이 단편집은 “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와 “24가지 색깔 메시지”라는 두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두 편 모두 와다 나오코의 감수성을 잔잔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일본산(産) 로맨스라 할 수 있다. “세월의 깊이를 소중히 하는 요코하마 거리에도 차례로 새 극장이 들어서면서, 허름한 동네 극장에 손님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한 지 몇 년….이제 그 시절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고…”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요코하마의 야경은 꼭 봐야 한다는 지인들의 충고에 따라 신주쿠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쯤 걸려서 요코하마에 도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날의 요코하마는 거센 비가 내렸고, 그 아름답다는 야경은 볼 틈도 없이 그저 가이드 북을 따라 몇몇 관광명소만 재빨리 돌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만두와 볶음밥만 먹고 돌아온 아쉬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요코하마 항구 거리의 정취 있던 풍경은 한참 지난 현재까지도 내 머리 속에 꽤 오랫동안 남아있다. “문을 닫는 건 간단하지만 한 번 놓쳐버린 풍경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첫 번째 단편 “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는 요코하마라는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답고 쓸쓸한 사랑이야기다. 여자 주인공인 치호와 남자 주인공인 료지는 어린 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지내온 사이로 현재 료지는 직업이 CM감독인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고 치호는 요코하마에서 아버지의 카페 일을 도우면서 각각 떨어져 지내고 있다. 료지의 첫 작품이자 영상전문학교 졸업작품은 치호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영상이었다. 그러나 료지는 이 작품을 계기로 영상 크리에이터의 등용문인 ‘미디어 상’을 수상하면서 재능 있는 CM 연출자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치호는 료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낡은 영화관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카페 일을 도우며 료지가 도쿄에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료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궁금했던 소녀 치호는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료지에게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면서 요코하마를 지키고 있다. “돌아왔구나…3개월 만이다…료지 오빠가 CM감독이 되어 도쿄에 살게 되면서, 매일처럼은 만날 수 없게 된 지 5년…내일 내 생일에는 만날 수 없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는 전형적인 일본 순정만화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랫동안 옆집 오빠를 짝사랑해왔던 소녀가 우연히 자신의 생일에 맞추어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사소한 오해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갑작스런 반전이 찾아오고,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낡은 극장에서 오랫동안 해왔던 사랑의 일방통행이 끝나는, 아름다운 답을 듣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부분은, 요코하마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곳곳을 보여주는 배경 연출과 요코하마의 명물인 차이나타운 ‘만복정’의 만두를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으면 주인공인 료지의 말처럼 “요코하마는 밤보다 아침이 아름다워”라는 대사를 언젠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유이치 오빠의 그림은, 모두 하나 같이 파랑 색을 바탕으로 한 쓸쓸한 느낌으로 언제부턴가 유이치 오빠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왠지 난 울고 싶어졌다.” 두 번째 단편 “24가지 색깔 메시지”는, 앞선 작품 “요코하마 키네마 시너리”보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단편으로서 훨씬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요절한 화가 유이치의 여동생 시오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단편은, 남녀간의 엇갈린 사랑이야기와 안타깝게 생을 마친 한 화가 지망생의 삶을 절묘하게 결합해 맨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읽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흔드는 힘을 갖고 있다. 마치 예전에 한국 영화 팬들을 열병에 걸리게 만들었던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하는 극적 구성인데, 이런 이야기 구성력과 잔잔하면서도 힘있는 연출법은 일본 순정 만화만이 펼쳐낼 수 있는 내공 있는 전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성향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 무렵 그저 행복해서, 언제까지나 셋이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슬픈 운명이 다가와 있는 것도 모른 채…” 절대로 강렬하지 않으면서, 애잔하고 쓸쓸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주변을 훑으면서 작품의 에피소드를 진행해나가는 일본 순정 만화의 진행방식은, 조용하면서도 천천히 이야기의 감정이 독자에게 쌓여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연출법을 일본 순정만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한국 순정만화처럼 강렬한 맛은 없지만, 이 일본식 방식도 어느 정도 적응되면 꽤나 강력한 중독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류의 감수성은 아마 만화를 만드는 나라 중에서도 일본밖에는 없을 듯 한데, 아다치 미츠루가 ‘청춘’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이 단편에서 엇갈린 채 지나간 사랑을 다시금 이어주는 방식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반전과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강한 감정의 파도는 이 단편을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 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류의 단편을 좋아하시는 독자들에게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