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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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세계를 반드시 앞과 뒤, 두 가지로 양분할 수는 없잖아요…” 상품성이 높아 잘 팔리는 만화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성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깊이가 있고 사회적인 의미가 있는 만화도 제작할 수 있는 것이 일본 만화 산업의 진정한 경쟁력일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

2011-09-26 김진수
“세계를 반드시 앞과 뒤, 두 가지로 양분할 수는 없잖아요…” 상품성이 높아 잘 팔리는 만화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성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깊이가 있고 사회적인 의미가 있는 만화도 제작할 수 있는 것이 일본 만화 산업의 진정한 경쟁력일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 만화 “새하얀”은,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무리가 있고, 어느 정도 사회경험이 있는 어른들이 봐야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작품이다. “진심으로 웃을 수만 있으면 인간은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는 겁니다….” 미망에 얽매여있는 세속의 사부대중에게 ‘무소유’라는 깨달음을 설파하신 법정스님께서 얼마 전 입적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불교계의 큰 기둥이었고 큰 어르신이어서 그 분의 입적을 아쉬워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이 말로써, 법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실천으로써 보여주신 큰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 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 -법정, 무소유 중에서 법정 스님의 말씀을 굳이 이 작품의 리뷰에 인용하는 것은, 이 작품이 법정 스님이 설파하신 삶의 견지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분석해볼 때,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과 인간을 ‘고(苦)’의 늪에 빠지게 하는 것은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貪),진(嗔),치(癡)” 는 모두 무언가를 가지려 하는 것, 즉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사람을 가장 얽매는 것은 바로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집착’이며, 집착에 빠져있는 한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불법은 설파한다. 그러나 현 사회시스템인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바로 무언가를 소유하려 하고 무언가를 편리하게 해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발현된다. 인간은 점차 게을러지고 점차 화려해지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만들고, 부수고, 바꾸어 왔다. 이러한 부조리에서 정신과 육체가 혼돈에 빠지고, 행복과 불행이 엇갈린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 “새하얀”은, 현실에서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순백의 마음을 가진 주인공 후카미 마시로(深見眞白) 를 전면에 내세워 마치 ‘불법(佛法)’을 설파하듯, 고단하고 묵직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진지하고 서글프게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가려고 마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이름 같은 것도 평생 같을 필요는 없죠. 우리는 그런 일을 해왔고, 무소유로 죽을 각오라면 정말로 소중한 건 가방 하나면 다 담을 수 있어요.” 후카미 마시로는 갑작스러운 폭발사고로 자신의 눈 앞에서 한 순간에 부모를 잃는다. 누가 보낸 폭탄인지도 모르고 짐작 가는 바도 없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는다.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가 불쌍할 것도, 두렵고 불안할 것도 없다. 복수를 꿈꾸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목적도 없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마시로는 부모의 죽음 이후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한다. 진심으로, “의미도 없이 사람을 도우면 안되나요?” 이 작품의 색깔은 매우 독특하다. 마시로의 여행은 아무 것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친구이자 스승이며 연인이다. 작가가 정해놓은 스토리가 과연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이렇게 독특한 컨셉의 만화는 본적이 없다. 마치 노장철학과 불교철학의 정수를 한 몸에 합쳐놓은 듯한 이 주인공은 때로는 노숙자와 친구가 되고, 불법체류 노동자와 동거하기도 하며,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살을 택한 실직중년의 명복을 빌어주기도 한다. “정말로 소중한 건 자기들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다들 관심 있는 건 자기의 반경 3m이내….이유도 동기도 없는 인간에게 설명해봤자 의미 없어, 각자 자신이 제일 원하는 건 자기가 선택해야 하는 거야…내버려 둬” 이 작품은 현재 한국어 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다. 2권이 끝난 지금은 주인공인 마시로와 천재소녀 린의 동행으로 작품의 큰 줄기가 잡혀가고 있는데, 앞서도 설명했듯이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이해하기엔 이 작품이 매우 어렵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상업성이나 만화적 재미를 덧붙일만한 에피소드들도 등장하지만, 작가는 결코 작품의 기획의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소통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마시로의 여정’에 작품의 중심을 맞추어 놓고, 리얼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다고 느껴질 때, 사랑하는 연인이나 오랫동안 믿어왔던 친구를 잃었을 때, 세상이 나를 져버린 듯 모든 것들이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이 왔을 때, 이 작품을 읽어보길 권한다. 아마도 아주 조금은, 당신에게 편안함을 안겨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