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다마다, 허나....저 노론들이 세자에게 내세운 혐의는 정당하다. 사실 유무는 상관없지, 그런 게 정치니까, 난 저들의 그러한 정치로, 형의 죽음 위에 세워진 왕이다. 저들을 부정하면 나 역시 부정되네, 지금의 난 세자를 살릴 힘이 없어! 그럼에도...그럼에도....난 내 아들을 살리고 싶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네, 자네의 지혜가 필요해.”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끈 임금이자 비극적인 가족사로 연결되어있는 두 왕 영조와 정조, 이 두 임금의 시대에 숨어있는 창작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시대 자체가 전통과 혁신, 보수와 진보가 뒤엉켜 싸우며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려 발버둥 치던 때였고,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유지하던 가장 큰 근간인 신분제도가 서서히 부서져 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가장 드라마틱한 소재는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자결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죽어버린 비극이다. 천륜이라는 혈연마저도 단호히 끊게 만든 정치의 냉혹함, 권력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명확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이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룬 옛날 드라마들에서는, 사도 세자가 정신병에 걸려 음행과 패악을 일삼아 세자로서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한 영조가 폐세자의 명을 내렸고 그 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고 결국은 반란까지 꿈꾸자 결국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다소 믿어지지 않지만 왠지 그랬을 것도 같다는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마치 진실처럼 여겨졌으나 그 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도 세자의 죽음”에 관한 많은 사료가 보충되었다. 무수리를 어머니로 두었다는 신분적 결함을 지닌 영조를 왕으로 만들며 최고의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당파 ‘노론’은 50년이 넘는 영조의 제위기간동안 절대 권력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이에 반발해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자들이 차기 권력인 사도 세자의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결국 비극이 촉발되었다는 이야기가 현재로서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전통과 보수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정치세력과 혁신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들의 정치세력이 전면적으로 충돌한 것이며 결국 이 복잡하고 처절한 싸움은 아버지가 아들을 감금해서 죽이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문무 양쪽에 정통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호방하고 거침없는 성품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그가 꿈꾸던 "새로운 조선"은 요절한 그의 짧은 인생경력 탓에 실제로 구현되지 못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훈련도감 교관 임수웅! 그대에게 어명을 내리노라! 짐은 무도한 세자에게 대역죄를 물을 것이니, 그대는 대역죄인 사도세자를 구하라!!” 이와 같은 실제 역사의 비극을 바탕으로 깔고 “야뇌 백동수”는 아주 참신한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한다. “정말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었을까?” 작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이 기발한 상상은 작품의 단단한 토대가 되어 매력적인 스토리로 구체화된다. “사도 세자가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상상력에 덧붙여 실제 역사에서 활약한 무사 “백동수”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이미 설정 단계에서부터 80는 성공을 보장받았다 할 수 있다. 백동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증조할아버지 백시구가 1721년 신임사화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사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복권시켜 호조판서를 추서하고 시호까지 내려 백동수 집안은 충직한 무인의 후예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정조의 명으로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맡게 된다. 이처럼 백동수(1743~1816)는 실존인물이다. 정조의 명으로 무예교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무인인 것이다. 이 책은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우리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조선 무예의 완성이자 동양 무예의 보고다. 백동수는 무예의 최고 고수일 뿐 아니라 당대의 지성인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의 벗이었다. 이덕무의 처남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덕무가 자기 글에 대한 평을 부탁할 만큼 문무를 겸비했고,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와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던 두 벗, 이덕무, 박제가의 우정의 결실이기도 하다. 백동수가 총괄하고, 이덕무가 문헌을 고증하고, 박제가가 본문 글씨를 썼다. 조선왕조실록에 백동수 기록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는 한 줄뿐이지만, 벗들과 당대 문인들이 남긴 글에서 그의 풍모를 알 수 있다. 그는 정조가 아끼고 박지원과 이덕무가 사랑한 선비였으며, 사라진 전통무예의 맥을 되살린 무예가이다. 숙종 때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에게 조선검법을 전수 받는 한편, 태식으로 내공을 쌓고 의술까지 익혔다. 청년시절에는 학문보다 무술연마에 깊이 빠져들어 주위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그의 주위에는 박제가, 이덕무, 김홍도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년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박지원과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았다. 1771년 식년무과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관직 수가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하자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10여년동안 농사일을 하면서 무예를 연마하며 보냈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받았고, 1788년 마흔 다섯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었다. 초관은 1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린 종9품 무관이었다. 이듬해 가을부터 무예서 간행작업에 착수하여 1790년(정조 14년) 4월 29일, 마침내 무기술 18기에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해 24반 무예를 수록한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박제가가 쓴 글에 따르면, 백동수는 "말 달리고 활 쏘고 검을 쓰며 주먹을 뽐내는 부류, 글씨와 그림, 인장, 바둑, 거문고와 비파, 의술, 지리, 방기(方技)의 무리부터 저잣거리의 교두꾼,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나서서 도타운 정을 나누지 않는 날이 없었다." 사귐에 차별이 없었던 것은 서얼 출신(할아버지 백상화가 서자였다)으로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경서와 사기(史記)를 능히 논할 만했고"(박제가), "무(武)로써 문(文)을 이루었으며"(성대중) "예서와 전서에 뛰어났고"(박지원), "다시 못 볼 기남자(寄男子)"(성해응)였다라고 되어 있다. (출처: 실존인물 `백동수`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현재 6권까지 나와 있는 “야뇌 백동수”는 벌써 드라마화 되어 공중파를 타고 방영되고 있다. 이야기 자체의 탄탄함과 뛰어난 작화와 시대고증, 역사와 픽션이 아주 잘 섞인 매력적인 작품으로 오랜만에 종이잡지를 통해 만난 한국산 웰메이드 정통극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