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참, 왜 대뜸 좋다고 말해버린 거지? 아마도 난생 처음 받아본 고백에 너무 당황해서 그랬을 거야.” 매우 독특한 서사 구조를 가진, 눈에 띄는 순정만화 한 편이 나왔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인 일본작가 쿠라모치 후사코의 “역에서 5분”이라는 일본만화다. 이 만화는 아주 특이하게도, 서로 아무 연관성도 없고 이야기도 각자 다른, 매 회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끼리 알고 보면 “역에서 5분”이라는 시공간 개념에 의해 다 같이 얽혀져 있다는, 매우 유니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사와다가, 교통사고?! 2학년 직장 체험 때도, 영화 교실 때도, 그래, 생각났다. 사와다는, 사는 동네에 따라 조를 나눌 때 늘 나와 같은 조였어, 하지만 평소엔 통 오질 않거나 와도 중간에 가버려서 별다른 기억이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 모임 때는 처음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 같아, 7가는 토박이 주민들이 많은 대신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반면, 신입생은 주로 토지개발이 진행 중인 4가 쪽으로 이사를 오는데 나와 사와다가 그 경우였다. 자기가 빠진 후 혼자 남게 될 날 가엾게 여겨서?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그래...그러고 보니 한 동네였구나.” 첫 번째 에피소드는 하나조메 역 근처에 있는 하나조메 중학교 3학년 B반을 무대로 펼쳐진다. 같은 반 남학생인 사와다로부터 갑작스런 고백을 받게 된 학생회 임원 요시코는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래, 사귀자”고 대답한다. 그러나 뜬금없게 느껴진 고백 직후 사와다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평상시 불량스러웠던 문제아의 모습에서 갑작스레 얌전한 모습의 모범생 이미지로 변해 학교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요시코는 사와다에 대한 미묘한 감정 때문에 심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서서히 사와다의 주변에 맴돌면서 사와다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아직 그대로인지를 확인해 보려하는 요시코와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 아주 소중했던 감정’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사와다, 이야기의 끝은 잔잔하고 흐뭇한 해피엔딩이지만, 마지막 사와다의 대사가 주는 감동이 오기까지 일체의 과정이 아주 세심하게 잘 구성되어 있어 읽는 맛이 제대로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눈도 마주쳐 주지 않네, 날 모르는 거야, 그 고백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한 달 전, 사와다의 머릿속에서 난 히로인이었는데, 이젠 그저, 그 외 다수 중 하나일 뿐” 사와다의 마지막 대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교내 마라톤 대회 예행연습 중에 사와다의 ‘단어장’을 들고 요시코와 사와다가 단어의 순서대로 길을 따라 되돌아가는 것이다. 민들레, 담, 맨홀, 우체통, 전선, 간판, 문, 복도, 계단, 교실, 칠판, 크리너, 창문....그리고 마지막 단어인 3학년 B반 교실의 ‘창문’ 앞에서 요시코는 사와다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숨어있던 자신에 대한 진심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런 요시코의 모습을 보며 사와다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 그녀에게 말한다. “이 쪽이구나, 골인지점이, 그랬구나, 난 널 좋아했던 거야.” “나도 참...중학생과 이젠 36살이 된 아오노를 착각하다니, 이젠 가고 싶지 않아,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할머니 장례식도 마치고,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아오노와의 약속을 지켜 후련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오히려 마음의 짐만 더 늘었어, 난 그저 간단한 조사만 받고 나왔지만, 택시 기사는 어떻게 됐을까? 아이가 뛰어들기 직전 내가 외치는 바람에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고 날 감싸줬지, 그 아인 어떻게 됐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는 하나조메 역 근처 하나조메 파출소에 근무하는 순경 아오노와 아오노가 20년 전에 이사한 고향, 나가노 현의 우에노다 주민 센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노부코의 이야기다. 두 번째 에피소드 역시 마지막의 잔잔한 감동을 향해 달려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마지막에 아오노가 내뱉는 대사 한 마디가 읽는 이에게 편안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잘 만들어진 에피소드다. “무리야, 노부코에겐, 그녀는 지독한 방향치거든, 어릴 때 그녀를 늘 따라다녀 달라고, 이 사람 할머니가 부탁했지..... 길 잃으면 여기로 전화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요시코 & 사와다 커플’이 간간히 등장해 마치 풍경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중요한 사건은 노부코가 탄 택시가 사와다를 치어 교통사고를 내면서 기억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상 첫 번째 에피소드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편집 순서가 뒤바뀌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정도로 동시적인 시공간 상에 놓여있다. 그러나 노부코에 대한 아오노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역시 사와다의 교통사고이며, 요시코에 대한 사와다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역시 사와다의 교통사고라는 점에서 작가의 스토리 구성력을 칭찬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짜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재능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교통사고’라는 하나의 ‘사건’만 공유할 뿐, ‘요시코 & 사와다 커플’의 이야기와 ‘아오노 & 노부코 커플’의 이야기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에 별개의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수미쌍관의 법칙이 잘 적용된 시를 한 편 읽는 것처럼, 두 개의 이야기가 결말까지 다다르는 과정과 마지막 대사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느낌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이다. “아, 그럼, 이건 어때요? 만일, 당신 휴대폰이 이제부터 1분 안에 울리면, 나랑 친구하기, 어때요?” “역에서 5분”은 현재 1권만 한국어판으로 발매되어있다.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에서 5분 world”라는 제목으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도와 서로 연관된 사건에 대한 요약을 알아보기 쉽게 도표로 정리해놓았다. 오랜만에 만나본, 일본 순정만화의 독특한 감수성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수작(秀作)이란 느낌이다. 하루빨리 2권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책 표지에 “이 작품 한 권 그리는데 2년이 걸렸네요.”라는 작가의 말을 보니, 다음 권이 빨리 나오진 않겠구나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읽은 후에 아주 예전에 본 일본 영화, 이와이 슈운지의 ‘4월 이야기’를 보고 느꼈던 아련한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작품이 주는 아주 일본적인, 세심하고 미묘한 느낌의 감수성을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