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탈리아 인은 강한 불에 볶은 원두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마시는 걸 즐기지만 그건 로브스타종 원두를 주로 쓰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본사람은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아, 이건 주로 아라비카종의 양질의 원두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일본 사람은 이노신산, 글루타민산 등의 담백한 맛에 민감해서 커피 자체의 맛을 끌어내는 걸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 “언더커런트”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긴 일본의 작가 토요다 테츠야의 단편집 “커피시간”이 한국어 판으로 출간되었다. 총 17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단편집은 ‘커피’라는 소재만 공유하고 있을 뿐 모두 다른, 매우 독특한 여운을 주는 개성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뭐, 커피 한 잔만큼의 얘기는 들어주마.” 이 독특한 단편집의 매력은 매우 짧은 에피소드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여백’과 ‘느림’의 미학에 있다. 신선한 느낌의 판타지부터 리얼하고 쓸쓸한 이야기까지 이 모든 이야기가 한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에피소드마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짧은 분량 속에 이렇게 애잔한 느낌의 정서와 철학적이고 함축적인 결론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음…결점에 대한 기준이 커피만큼 심플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경우는, 심플한 기준만을 허용하는 사회는 취약해서 무너지기 쉽거든, 그리고 수확한 커피콩은 그 시점에서 끝나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달라지잖아?”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돈?, 사랑?, 아니면 여유? 작가는 17가지의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집착하고, 얽매일 때, 그래서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상황이 만들어내는 압박감 때문에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아주 사소한 질문일 뿐이다. “산다는 게 어떤 건데?” “음…글쎄, 어떤 걸까? 역시 변해가는 것 아닐까?” 세 번째 에피소드인 “gooseberry”에서는 무언가 우울한 일이 있어서 이모를 찾아 온 사춘기 소녀가 이모와 함께 커피 생두를 볶으면서, ‘삶’을 커피에 빗대어 마치 선문답 같은 대화를 한다. 이모와 조카는 약 이십여 분의 작업시간 동안 사람과 인생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무언가 고민이 해결된 듯한 모습으로 조카는 돌아가고 이모는 자신의 언니에게 아이는 괜찮아 보인다며 안심하라는 전화를 한다. 조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모의 직업은 무언지, 이 둘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나오지도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이 불친절한 구성법은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몇 페이지 안 되는 이 에피소드를 다 읽고 나면,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묘한 여운과 편안함이 남는다. 다른 나머지 에피소드들도 다 이런 식이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배경에 대한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때로는 판타지의 공간으로 때로는 차가운 현실로 시공의 제약 없이 마구 넘나들면서, 단지 ‘커피’라는 소재만 공유한 채로, 독자에게 던질 뿐이다. 직구 같기도 하면서 변화구 같기도 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 묵직한 공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 단편집에서 “커피”는 단순한 소재 이상의 ‘그 어떤 것’이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조연으로,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배경으로,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주연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커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때로는 휴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아주 아쉬운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절대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힘들게 자백한 살인범에게 수고했다며 한 잔 권하는 늙은 형사에게, 상처를 입고 은둔한 이에게 조용한 결심을 하게 해주는 어떤 이의 말 한마디에, 두려움에 빠져 벌벌 떨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따뜻한 평안함을 주는 어느 할아버지의 늙은 손에, 모락모락 좋은 향이 피어나는 “커피”는 들려있고, 그것은 영혼마저 지쳐있는 눈 앞의 상대에게 말없이 건네어 진다. 그 따뜻한 “커피”를 건네어 받은 상대가, 커피를 마신 후에 어떻게 변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때는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평화롭고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며 노닥거리는 순간이니까, 만약 그런 시간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카페인이 매우 부족해서일 거다. “인생에 필요한 게 뭔지,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뭔지, 술? 사랑? 돈? 그런 건 너무 강해, 난 한 잔의 커피라고 생각해, 한 잔의 커피와 흥얼거리는 노래, 그것이 삶의 위안이 되지, 자, 커피를 마시자고! 지금 당장!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자, 커피를 마시자. 지금 당장! 왜냐하면 인생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리니까!” 17개의 단편들을 통해, ‘커피’라는 소재로 발견해 내는 사람들의 삶의 비밀 한 조각은 무척이나 생경하고 신선한 느낌으로 읽는 이에게 다가간다. 스토리 위주의 작품들을 좋아하시는 독자들에게 이 단편집은 언뜻 보기에 매우 불친절하고, 엉성해 보이며, 앞뒤가 헷갈리는 언짢은 작품일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에, 따사롭고 기분 좋은 가을 햇빛 아래서 읽어본다면 이 단편집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17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 자세, 오직 그 것 한 가지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상기후로 인한 긴 장마가 끝나고, 드디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가을 햇살과 기분 좋은 산들바람 속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아주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