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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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 (운명의 여자)

“이 여자가 소소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좀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그 남자에게 가장 답답하고 심난한 경우는 상대방 여자의 마음을 도통 알아차릴 수 없을 때다.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이...

2011-08-11 김진수
“이 여자가 소소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좀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그 남자에게 가장 답답하고 심난한 경우는 상대방 여자의 마음을 도통 알아차릴 수 없을 때다.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이 여자의 진심인 건지 아니면 장난인 건지, 자기를 이성으로서 느끼는 건지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는 건지, 마구 헷갈리기 시작하고 점차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여러 차례 떡밥도 던져보면서 진심을 떠보지만, 여전히 그 여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을 때, 남자는 짜증이 나고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알아야 한다. 바로 그 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이 점점 더 증폭되기 시작하고 미리부터 쳐져 있던 그물에 걸려서 헤어나오기 힘든 덫에 발목을 잡혔다는 것을, 설령 그 여자가 그 상황을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수컷의 심리요 본능이자, 신이 만들어놓은 음양(陰陽)의 도(道)요, 암수관계의 오묘함이다. “이대로 선배의 손을 잡으면….이런 생각을 하면서 인파 사이로 사라져 가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안기러 가는 뒷모습을….지켜보았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여자는,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수컷들에게 그물을 치게 되는 여자다. 이런 여자들에게 걸리면 어떤 남자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지게 되어있다. 단순히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몸매가 너무 좋아서 수컷들이 걸려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그 여자를 감싸고 있어 그 강렬한 느낌에 남자들이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자들이 무서운 것은, 자신은 그 남자를 수컷으로서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 남자와 무언가 특별한 관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더 무섭다. 사랑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짝사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녀가 자신을 돌아볼 거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이 무서운 일방통행은 남자를 미치게 만들고, 무섭고도 집요한 집착을 생성하며, 자신만의 환상에 빠져 그 여자를 여신처럼 떠받들게 만든다.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기 때문에, 점점 더 잔인해진다. 그 남자를 상처 입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스킨십을 하고, 무언가 기대를 할라치면 차갑게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서서히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인생을 좀먹어간다. “최근 내 일상은 이렇다. 일단 선물을 준비한다(대충 부원 수의 반 정도) 천천히 일단 노크를 하고, 잽싸게 들어간 후, 마치 찾는 것 따위는 없다는 양 태연하게 부실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 대상을 발견한 순간, 이번에도 난,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이름의 본의 아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자각하곤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만화 “팜므파탈”은 바로 이런 어긋난 사랑에 빠져 버린 한 남자의 처지를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을 그저 동아리 후배로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남자로서 생각하는 건지 모를, 묘한 매력의 여자선배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게 되어 버린 불쌍한 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여자에게는 듬직한 애인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도 좋아 둘 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힘들다. 그러나 애인에 대한 서운함을 얘기할 때 자신에게만은 우울한 표정을 보여주며 쓸쓸함을 표현하고, 술에 취한 밤이면 살며시 어깨에 기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 생각 없이, 자상한 미소와 말투로 그 남자의 감정을 일상 속에서 쉴 새 없이 건드린다.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여자의 그물에 걸려든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그녀라는 이름의 강력한 덫에서 빠져 나오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덫이란 것은 원래가 그런 것이다. 빠져 나오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더욱 발목을 조여 결국엔 시뻘건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이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웃고, 걱정 따윈 하나도 없다는 듯 행동하면서…그런 식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좀 더…그런 부분을 보고 싶어진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런 류의 만화가 한국 남자 독자들에게 은근히 잘 먹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일본만화 특유의,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감정을 건드리면서, 매 에피소드마다 무언가 진전될 듯하다가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끝나는 이런 구성은 읽는 사람을 은근히 지치게 만든다. 겉으로야 ‘감질나고 짜증나서 못 보겠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이 화끈한 한국 남자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어하는 몇몇 마초적인 남자들도, 사실은 내심 이런 장르를 꽤 좋아한다. 이 구성 방식의 무서운 점은 결말을 알고 싶은 그 찝찝함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도 계속 책장을 넘기고 다음 권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계속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약한 모습도, 그리 간단하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나 자신도…” “팜므파탈(Femme Fatale)”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라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는 “요부(妖婦)”로 표기되어 있다. 스릴러 영화나 미스터리 추리극에서 남자 주인공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여자 주인공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사실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지도 않았고, 화려한 외모나 몸매로 남자들을 정신 없게 만드는 그런 요부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둔하고 생각 없어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조금은 눈치 없고 바보 같은 그런 여자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자상함과 순진한 미소로 남자들의 가슴을 예기치 않게 파고드는 이 여자 주인공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팜프파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이고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어느 정도의 잔재미는 보장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