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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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일생

“아무 생각 없이... 난생처음 긴 휴가를 내서 체면치레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어, 병원에 계신 할머니한테 전화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자전거로 병원을 왔다 갔다 했어...그제 밤 TV보...

2011-08-02 유호연
“아무 생각 없이... 난생처음 긴 휴가를 내서 체면치레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어, 병원에 계신 할머니한테 전화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자전거로 병원을 왔다 갔다 했어...그제 밤 TV보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얼마 전부터 폐렴 증세가 있긴 했지만,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는 연락이 와서...불렀어...아주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는데....너무 맥없이 가시더라, 그냥 간단한 입원이라고 생각했는데....퇴원해서 다시 염색이며 밭일을 하실 거라고...” 「사랑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는 유명한 말처럼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인연(因緣)만큼 이야기의 소재로서 적합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 “남자의 일생”은 예상하지 못한 만남으로 시작해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으로 발전해가는 남녀를 잔잔하면서도 매우 유니크한 시선으로 표현한 오랜만의 수작(秀作)이다. “어젯밤부터 별채에서 지내고 있죠. 조모님한테 못 들었나요? 난, 카이에다 쥰이라고 합니다. 봄까지 도쿄 슈쿠아이 여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죠, 사실 난 꽤 오래 전에 이 열쇠를 받았어요, 언제든 필요할 때 써도 좋다고 해서...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전에도 몇 번...이번엔 카도시마 대학에 있는 친구가 가을부터 요양을 하게 되어 대타로 당분간, 사실 올해는 내내 빈둥거릴 예정이었거든, 시내에 맨션이라도 빌릴까 생각했었는데, 들어보니 여기서 신칸센으로 30분 남짓 걸린다기에, 그럼 여기서 다닐까 싶어 3일 전에 전화했더니...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어쨌든 열쇠를 받았어, 이곳에 온 게 처음도 아니야, 자네 조모님은 염색가로서 전에 도쿄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 적이 있지, 난 그 때 학생이었어, 끝.” “예기치 못한 만남과 그로 인한 사랑의 인연”, 사실 이런 소재는 로맨스를 표방한 이야기에서는 거의 공식처럼 여겨지는 단골 소재다. 그러다 보니 너무 뻔하고 틀에 박힌 느낌들이 강해서 에피소드를 어떻게 각색하느냐, 또는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작품 성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물론 아무리 흔하다고 해도 이 소재를 이길만한 파격적인 소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로맨스는 ‘만남’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대에 있다 보니 여자들 패턴은 빠삭하게 꿰고 있지, 자네 같은 아이들 많이 봤거든, 자네는 똑똑하지만, 한층 더 똑똑해져야 해, 여자는 어리석지만, 남자는 그보다 훨씬 더 어리석거든, 연습이다 생각하고 날 상대로 연애라도 해보라고.” 도쿄의 거대 전기회사 요츠바에 다니는 츠구미는 장기 휴가를 내고 시골의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마음에 크나 큰 상처를 입은 츠구미는 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채로 어떤 목표도, 지향점도 찾지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생각 없이 ‘보내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원 중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장례식이 끝나고 츠구미는 그대로 당분간 할머니 집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할머니의 집과 땅을 자신이 사겠다고 말을 꺼낸다. 가족과 친척들이 돌아간 후, 피곤한 몸을 누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츠구미, 다시 아침이 오고 눈을 뜬 그녀 앞에 할머니로부터 집의 별채 열쇠를 받았다는 정체불명의 중년 남자가 나타난다. “그만 됐어, 자네 과거 얘기 따위, 관심 없어, 행복 얘길 하면서 자네는 꼭 고개를 숙이는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는데, 어째서 눈앞에 있는 날 보지 않는 거지? 츠구미, 난, 널 혼자 두지 않아.”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롭고 유쾌한 것은, 캐릭터다. 남자 주인공인 51세의 대학교수로 여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유명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한 카이에다 쥰은 지성적인 느낌의 노안경을 쓰고 멋지게 담배연기를 휘날리면서 두꺼운 책을 느긋한 자세로 읽는, 아주 매력적인 중년 독신남이다. 철학을 공부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카이에다는 남의 일에 절대 끼어들지 않는 대신 타인이 자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연륜과 관록이 느껴지는 사색적인 말투와 행동, 아주 가끔씩 보여주는 슬프면서도 자상한 표정은 이 남자에게 무언가 만만치 않은 사연이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 주인공인 도조노 츠구미는 대형 전기 메이커인 요츠바에서 발전소를 만드는 일을 하는 엘리트 커리어 우먼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독신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지만 사실은 유부남과의 사내(社內) 불륜으로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어 ‘남자’를 사랑하기엔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호의와 관심도 다 거부한다. 마음에 단단한 벽을 쌓아둔 탓에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부조화스러운 표정과 몸짓, 행동을 가끔 하곤 하지만 이 문제 이외에는 무슨 일이든 혼자서 잘 해낼 수 있는 능력 있고 자존감 있는 여자다. “편지에는, 그가 오랫동안 양어머니에게 송금했다는 것, 그리고, 양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걱정했다는...내용이 적혀있었다. 내일 그는 돌아가신 양어머니를 찾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다신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할 수 없지, 이 집에 그가 원하는 사랑은 없으니.” “남자의 일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연령대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작가가 아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펼쳐내는 50대 남자와 30대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아이들이 읽고 공감하기엔 경험의 수준이 너무 높다. 그러나 적어도 30대정도의, 사회 경험이 웬만큼 있는 성인들이라면, 이 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괜찮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뻔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려면 작가가 쓸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각색을 잘 하거나 구성을 잘 해야 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선택한 기법은 “디테일”이다. 매 회 에피소드마다 아주 조금씩, 둘 사이의 감정을 접근시키면서 아주 세심하게 주인공들의 내면을 독자가 들여다볼 수 있는 디테일한 장치들을 선보인다. 안경, 편지, 목걸이, 담배, 책, 심지어는 태풍이나 식사, 기차시간표까지도 작가의 “디테일한 기법”을 통해 독자와 주인공간의 간격을 좁히고 이야기의 내밀함을 서서히 채워나가는데, 이러한 방식이 독자들이 그들의 사랑을 재밌게 구경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만드는 이유다. 현재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으며, 잔잔하고 편안한 느낌의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주 마음에 들어 할 작품이다. 무언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나 삶의 격렬함에 지친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