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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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배트

“이 도시에 사는 자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뉜다. 운이 좋은 자와 운이 나쁜 자, 돈 많은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불패의 철인 레슬러 ‘게일리 그리즐리’가 아마존의 살인자 ‘어메이징 피라니아’의 ‘피라니안 데스록’을 먹고....마침내 패배했다. 서글...

2010-12-29 김현우
“이 도시에 사는 자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뉜다. 운이 좋은 자와 운이 나쁜 자, 돈 많은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불패의 철인 레슬러 ‘게일리 그리즐리’가 아마존의 살인자 ‘어메이징 피라니아’의 ‘피라니안 데스록’을 먹고....마침내 패배했다. 서글픈 밤이군....센티멘털한 기분이 들 때는 반드시 불쾌한 일거리가 날아온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현존하는 만화작가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이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람, 우라사와 나오키일 것이다. “슬램덩크”로 초대박을 친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요즘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그린 “베가본드”나 장애인 농구를 소재로 한 “리얼” 등의 작품으로 작가주의적인 행보를 걸어가고 있다면, 초기작인 “파인애플 아미”부터 출세작인 “마스터 키튼”, “야와라”, “해피”, 힛트작인 “몬스터”, 가장 최근작인 “플루토”, “20세기 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꾸준하고도 기복 없는 행보는, ‘상업 작가’의 가장 훌륭한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균형 있게 갖춘 양질의 작품들로 필모그래피를 화려하게 채워가고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가장 큰 장점은 긴 세월 꾸준하게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1983년에 데뷔한 이래로 3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이렇게 꾸준히 힛트작을 그려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매번 새로운 작품을 낼 때마다 자신의 색깔을 공고히 유지하면서도 작품 별로 확실한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은 천재가 아닌 이상 정말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내놓는 작품마다 “재미와 감동” 양쪽 모두 충족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위에 열거된 어떤 작품도 한 번 잡으면 마지막 권이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이 작가의 창작 작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증명하고 있다. 물론 우라사와 나오키가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혼자서 작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같은 만화산업 불모지에도 허영만 같은 탁월한 만화가가 있는데, 만화왕국 일본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이 결코 신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만화를 즐기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고마운 작가는 없다. 텍스트를 만화로 재미있게 바꾸는 능력 또한 천재의 영역이며 만화가로서의 연출력과 구성력이 스토리 창작보다도 훨씬 중요한 재능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만화를 본 적이 있어, 일본에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신작 “빌리 배트”는 현재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리뷰를 쓴다면 딱 한 마디, “흥미진진한 롤러코스터 타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일본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흥미진진한 판타지는 처음에는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띠다가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로 단숨에 시공을 넘어 점프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민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선과 악”, 그 구분법과 근원적 고민에 대해 세밀하고 정교한 철학적 메스를 들이대면서도 만화로서의 재미를 결코 잃지 않는 노련함을 보이고 있다. 2권 동안 18개의 에피소드가 끝났는데도 이야기는 아직도 서론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과 정교한 재미를 선보이고 있는데, “20세기 소년”이후 나오키의 신작을 기다려온 팬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