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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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사냥

“때는 다이쇼 9년(1920년), 내가 17세가 되던 해의 봄이었다.” 소위 말하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되어, 많은 여성독자들에게 비밀리에 사랑받는 만화장르가 있다. 남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주요한 테마로 잡는 이 장르는, ‘BL’ 또는 ‘야오이’라 불리며 ...

2009-12-16 김현우
“때는 다이쇼 9년(1920년), 내가 17세가 되던 해의 봄이었다.” 소위 말하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되어, 많은 여성독자들에게 비밀리에 사랑받는 만화장르가 있다. 남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주요한 테마로 잡는 이 장르는, ‘BL’ 또는 ‘야오이’라 불리며 수많은 여성들의 은밀한 성(性)적 판타지에 대한 비밀스런 욕구를 충족시켜왔다. 마치 십대 소년들이 그 시절에 돌려보는 ‘빨간 책’처럼, ‘야동’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남성들 간의 동성애를 테마로 다루었다 해도, 하기오 모토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같은, 단지 "BL"이나 ‘야오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걸출한 명작들이 세상에 출현하곤 한다. “나를 죽여주지 않겠어?” 여기에 소개하는 “벚꽃사냥”은, “환상게임”으로 국내에서도 명성이 높은 일본 작가 와타세 유우의 신작으로 상,중,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중편이며, 현재 국내에는 서울문화사를 통해 상권만 출시되어 있다.(2009.11.08 현재) 표지에 너무도 당당하게 ‘19세 미만 구독불가’의 빨간 딱지를 붙이고 화려한 양장본으로 장정된 이 작품은,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의 한 귀족 가에 서생으로 들어간 순수한 소년이, 자신의 뜻과 의지와는 다르게,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아주 매혹적으로 그리고 있다.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는 관록 있는 작가가, 아주 오랜만에 독자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집중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이 장르에서 명작의 반열에 오를만한 그 어떤 ‘광채’를, 첫 권부터 은은하면서도, 때론 강렬하게 발하고 있다. “에로스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자신을 잊는 사랑’, 소망하는 것은 광기에 달할 정도로 상대와의 일체화, 자신의 생존조차 부정하는 맹목적 사랑” “벚꽃사냥”의 핵심은, 어린 나이에 비해 명확한 가치관과 행동방침을 지녔고, 충직하면서도 순수한 소년 타가미가, 마성의 옴므파탈 같은 아름다움과 기이하면서도 안타까운 매력을 동시에 지닌 자신의 고용주 소마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며 파괴되어 가는, 잔혹한 과정에 있다. 여기까지 이 작품의 소개 글을 읽어본 분 중에서는, ‘에이, 너무 뻔한 공수전개잖아’라고 살며시 미소를 띠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록 있는 작가 와타세 유우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간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장면들을 간간히 섞어 넣으면서 독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한편, 소마와 타가미 사이에 쌓여가는 탄탄한 감정의 교감을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서서히 증폭시킨다. 그러면서 작품 전반에 무거운 배경처럼 깔려있는 소마 가의 미스터리들을, 마치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 듯, 하나 하나, 조금씩 조금씩, 독자들 앞에 던진다. 마치 타석에 선 타자들을 자신의 뜻대로 요리하는 노련한 백전노장 투수처럼, 기막히다고 할 정도의 완급조절을 선보이면서, ‘작품을 지배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연출력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장르에 전혀 관심 없는 독자들에게도, 아마도 이 작품은 만화라는 예술이 가진 또 다른 영역을 선사할 것이다. 관록 있는 작가의 만개한 ‘지배력’을 마음껏 느끼면서 올 겨울, 명작의 느낌을 지닌 작품, “벚꽃사냥”을 한 번 읽어보시길 독자제현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