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조로 TESORO (오노 나츠메 초기 단편집 1998~2008)
“이탈리아에는 옷을 뒤집어 입는 것에 대한 미신이 있어요. 아키, 실수로 안과 겉을 거꾸로 입은 것은 좋은 징조라고 해요,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하는 일이 있으면 그게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죠. 아키한테도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not sim...
2009-03-12
유호연
“이탈리아에는 옷을 뒤집어 입는 것에 대한 미신이 있어요. 아키, 실수로 안과 겉을 거꾸로 입은 것은 좋은 징조라고 해요,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하는 일이 있으면 그게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죠. 아키한테도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not simple”, “납치사 고요” 등으로 한국에서도 조용히 자신의 매니아들을 만들고 있는 일본 작가 오노 나츠메의 초기작들을 모은 단편집 “Tesoro”가 출간되었다. 오노 나츠메 특유의 느긋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이 단편집은 매우 짧은 소품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조금 아쉬운 면이 있지만 오노 나츠메의 팬이라면 꼭 읽어 봄이 좋을 듯한 단편집이다. “바람을 가르며 걷는다고 한대, 이웃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말야. 성격이 급해서 엄청 빨리 걷잖아. 그런데 지금은 나한테 맞춰서 걷고 있잖아.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안다는 거지, 어쨌든 딴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아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싶어.” 오노 나츠메의 작품에는 향기가 있다. 그것도 희미하거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향기가 아니라 아주 강렬하고 분명한 향기가 있다. 그러나 정작 작품 자체는 굉장히 유려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띈다. 커다란 사건도 없고 극적인 변화도 없으며 전개도 매우 느리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혼자 느릿하게 가는 포크레인처럼 말이다. 그런데 눈에 띈다. 요즈음 나오는 만화들이 워낙 자극적이고 스피디해서 그런지 더 눈에 띈다. 그냥 단순히 느리게 걸어가기만 하는 거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자신의 향기와 특징을 확실하게 발산하며 느리게 걸어가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저속(低速)의 미학’이 오노 나츠메의 힘이다. “오늘은 배달하기에 딱 좋은 날씨네.”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일본 만화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오노 나츠메의 만화는 재미없다고 잘라 말할 것이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배배 꼬아진 추리물도 아니며, 환상의 나라에서 모험을 즐기게 해주는 판타지도 아닌 것이, 커다란 칸 배치에 인체 비례가 맞지 않아 오히려 더 귀엽다고 느껴지는 캐릭터들이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 이야기도 대사도 무척이나 일상적인 느낌일 뿐 무엇 하나 빠르고 명확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유려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오노 나츠메는 인생의 따뜻함과 풍요로움을 마치 산수화처럼 폭넓은 여백의 미학으로 잡아낸다. 인생의 진리가 여유로움에 숨어 있다고 항변하는 것처럼 오노 나츠메의 주인공들은 세월을 즐기며, 풍경을 즐기며 그저 존재한다. 물론 그냥 서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노 나츠메의 인물들도 자신만의 사연이 있지만 그 사연을 남한테 강요하지 않는 것 뿐이다. 너와 나는 분명히 다르지만 너와 나의 세계는 분명히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을 인정한 작가가 만들어 낸 매우 독특한 분위기가 바로 “Tesoro”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