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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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개정판

한국 만화사에서 “박흥용”이라는 이름은, “시마과장”등으로 대표되는 막강한 일본산 성인만화에 밀려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성인만화(대중적인 의미가 아닌 장르적인 의미다)의 역사에 인상적인 한 획을 긋고 뚜렷한 방점을 찍은 작가라 할 수 있다. 물론 고우영, 이두호...

2007-09-10 이지민
한국 만화사에서 “박흥용”이라는 이름은, “시마과장”등으로 대표되는 막강한 일본산 성인만화에 밀려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성인만화(대중적인 의미가 아닌 장르적인 의미다)의 역사에 인상적인 한 획을 긋고 뚜렷한 방점을 찍은 작가라 할 수 있다. 물론 고우영, 이두호,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등 자신만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통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중적인 인기를 구축해온 작가들도 분명히 존재하나, 박흥용의 작품은 위에서 열거한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흥용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선배들과 차별되는 자신만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적인 감수성”과 “문학적인 서정성”을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최초의 작가라 생각한다. 물론 이두호의 “객주”나 “임꺽정”, 허영만의 “오! 한강”이나 “담배 한 개비”, 김수정의 “오달자의 봄”이나 “일곱 개의 숟가락”, 이현세의 “며느리 밥풀꽃에 관한 보고서”나 “두목” 같은 평단과 독자를 모두 만족시킨 명작만화들도 있으나 이 작품들은 “만화”라 불리는 장르적 특성이 너무 강하게 지면 안에 녹아있어, 앞서 얘기한 “문학적인 서정성”이 작품 안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인용이나 독백 등의 방법을 통해 때때로 결합을 시도하지만 박흥용의 작품처럼 매끄럽게 읽히지를 않는다) 그래서 천천히 한국만화의 명작계보를 훑다보면, 위의 작가들이 문학작품이나 문학적인 소재를 “만화”로 각색했다면, 박흥용은 문학과 만화를 “결합”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작가라 생각한다. 그래서 박흥용의 작품은, 발표하는 모든 작품을 하나의 주제에만 매달렸던 백성민과 실존인물의 삶을 파고들어 ‘만화-다큐멘터리’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한 방학기의 중간지점에 존재한다. 그래서 만화애호가의 개인적인 바램으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한국 최고의 문학단편들을 박흥용의 만화로 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서자 출신의 검객 ‘견자’와 최고의 검객이자 침술사로 이름 높은 그의 스승, 맹인 황정학의 정처 없는 여행을 통해 “사회적인 모순에 저항하는 민중의 삶”과 “인생의 성찰”이라는 다소 상반된 주제를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낸 한국만화계의 수작이다. 주인공인 한견주는 “서자”라는, 자신의 출생에 얽힌 사회적 모순이 자신의 심신을 옭아매다 못해 하나의 한(恨)으로 변해버린 인물로 내심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누구보다도 강하지만,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요지부동의 부조리한 사회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남자다. 스승인 황정학을 만나기 전까지, 나이 열여덟의 한견주는 온 동네의 망나니 취급을 받으며 견자(犬子:개새끼라는 뜻)라 불리던 사고뭉치로, 특히나 서당에 다니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같은 또래의 적자 출신 남자들을 생트집을 잡아 구타하곤 했던, 심성이 삐뚤어지고 모든 일에 냉소적인 사내였다. 살인누명을 쓰고 관아의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는 사건으로 그의 평생의 스승인 맹인 황정학을 만나게 된 한견주는, 황정학의 범상치 않은 검술 실력과 세상사에 달관한 태도에 반해 자신을 자상하게 대해준 유일한 사람인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고 황정학을 따라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른다. 맹인 황정학은 이 작품 안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데 아홉 살 때까지 맹인이라는 이유로 항아리에 갇혀 살았던,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자신을 가두었던 항아리를 깨고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지팡이 하나에 자신의 육신을 의지하며 세상을 떠돌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검술과 침술에 득도한 신선(神仙)같은 인물이다. 조선 팔도에서 검 좀 쓴다고 이름난 자들에게는 최고의 검객으로 불리는 고수지만 무의미한 살생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침술로 많은 덕을 쌓은, 작품의 제목처럼 “구름을 벗어난 달”같은 존재다. 맹인이라는 육체적인 한계를 심안(心眼)으로 극복하고 휘두르는 칼끝이 결코 허공을 가르지 않는, 그러면서도 신분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결코 거스르지 않는, ‘완성된 사람’인 황정학은 주인공인 견주를 때로는 엄한 스승으로,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로, 때로는 오랜 친구처럼 대하며 정처 없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과 인연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견주에게 물려주려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달이 뜨지 않은 겨울밤에 손가락 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내 손 끝에... 달이 떴잖아.” 라고, 웃는 얼굴로 마지막 말을 남길 때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제자 곁에서 마지막 술 한 잔을 기울이고는, 평안하게 웃는 얼굴로 눈 내리는 겨울밤, 어느 양반 댁의 사랑채 한구석에서 떠돌이의 생을 마감하는 황정학의 마지막 모습은 아주 긴 시간동안 진한 여운을 남기는 명장면이었다. 조선 중기,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가 극에 달하고 절대적인 가치라 여겨졌던 제도적인 시스템이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농민은 궐기하여 도적이 되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던 정치인들은 비리로 얼룩진 관료들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짜낸다. 전국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민심이 흉흉할 때, 갑자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전 국토를 짓밟고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며 아녀자를 겁탈한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묵묵히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견자라 칭하며 스승을 따라 세상을 떠돌던 한견주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관군을 죽이고 산채에 투신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검호들의 결투를 보며 자신의 식견을 넓히기도 한다. 스승과 헤어져 도적이 되어 방황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 산자락에서 다시 만난 스승에게 어린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한견주는 그날 이후 황정학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스승의 모든 것을 흡수하며 “검”의 매력에 빠진 자신의 길을 갈고 닦는다. 이 작품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화의 배경을 연출하여 조선 중기 시대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사, 복장, 가옥 등의 시대적인 고증도 매우 훌륭하며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 사회적인 갈등요소들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미세하리만큼 잘 잡아내는 작가의 묘사능력이 정말 놀랍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완벽하게 녹아있다는 점이다. 황석영의 “장길산”과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강호의 독자제현에게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