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플리 (Suppli)
‘일과 사랑’이라는 테마는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매우 현실적인 테마라 할 수 있다. 일과 사랑을 양립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며 가끔씩 세상의 벽에 부딪혀본 어른들이라면 이 테마와 관련된 아픈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이 ...
2007-08-29
이지민
‘일과 사랑’이라는 테마는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매우 현실적인 테마라 할 수 있다. 일과 사랑을 양립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며 가끔씩 세상의 벽에 부딪혀본 어른들이라면 이 테마와 관련된 아픈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일과 사랑’이라는 테마에 ‘여성’이라는 테마가 곁들여지면 ‘OL(Office Lady) 코믹스’라 불리는 장르가 탄생한다. 원래 일본의 순정만화 장르 중 하나로 발달한 ‘OL(Office Lady) 코믹스’는 남성취향 위주로 편성되었던 성인만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여성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성인 만화 장르라 하겠다.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나 왕자님과 공주님이 등장하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판타지 순정물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담담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인 여성들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결혼, 직장 생활, 연애,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 등-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많은 성인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순정 만화 장르라 하겠다. 여기에 소개하는 ‘서플리’는 전형적인 ‘OL(Office Lady) 코믹스’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인 후지이 미나미는 광고회사에서 기획자로 근무하는 27살의 직장 여성이다. 후지이에게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교제해온 애인이 있고 직장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는 남자동료도 있다. 그러나 후지이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달콤한 사랑과 행복한 결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회사라는 갑갑한 조직 속에서 일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다. 광고 기획자로서 후지이의 자긍심은 “단 15초 만에 보는 사람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는 매체는 광고밖에 없다. 언젠가 나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세상 사람들이 경악할 만한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려는 후지이의 밤샘작업은 번번이 ‘여자’라는 벽과 회사라는 ‘시스템’에 막혀 수포로 돌아가고, 직업에 대한 거창한 자긍심은 오히려 그녀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현실의 벽’으로 작용한다. 연일 발생하는 클라이언트의 클레임과 그것을 보충하는 밤샘작업이 반복되면서 후지이의 ‘여성’은 망가져가고 후지이의 ‘사랑’은 다른 여자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서서히, 조금씩, 주변의 익숙했던 것들이 망가져가고 점차 지쳐가던 후지이는 일상의 모든 것이 허무해져만 가고, 직장의 여자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막막하게 상상하는 ‘슬럼프’를 겪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7년간 사귀었던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 “‘미래의 그 즈음에 우리는 서있을까 -(SMAP의 노래 가사) ’, CD에서 음악이 흐른다. 그 당시의 SMAP은 이제 연하가 되었다.” 서정적이고 잔잔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서플리”의 특이한 점을 굳이 들자면 매우 스타일리쉬하다는 점이다. 연출과 그림과 대사를 매우 감각적으로 매치시킨 에피소드들이 뮤직비디오를 보듯 엮어져 가는 “서플리”는 이런 방식을 싫어하는 독자에게는 매우 산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만화일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무겁게만 느껴지는 일상 속에서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는 느낌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밝은 정서라면 ‘일과 사랑’을 양립시키기 위한 ‘여성’으로서의 갈등과 노력, 경쟁, 절망, 슬픔, 동료애 등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두운 정서라 하겠다. 2007년 현재, 21세기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아시아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보다 낮고 남성의 자유에 비해 여성의 ‘걸림돌’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모순과 부조리를 안고 태연히 돌아간다. 우리 주위의 여성들은 불합리한 시스템 속에서 매일 절망하지만 매일매일 다시 일어선다. 사실 여성들의 이런 꿋꿋함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예전에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헤게모니와 겉치레를 위해 서로에게 날만 세우는 수컷들의 공격성을 세상의 저변에서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 있는 여성들의 인내심과 자애로움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진정한 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