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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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포박 (잠깐 동안의 승충)

기다리던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는 것은 만화 애호가로서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발견했던 만화 “묵공”은 그 당시 나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과 박진감 넘치는 연출은 차치하고서라도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무대로 각자의 사상과...

2007-08-28 석재정
기다리던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는 것은 만화 애호가로서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발견했던 만화 “묵공”은 그 당시 나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과 박진감 넘치는 연출은 차치하고서라도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무대로 각자의 사상과 철학을 펼쳐냈던 제자백가(諸子百家), 그 중에서도 묵가(墨家)의 숨겨진 이면과 철학을 이렇게 재미있고 깊이 있는 만화로 풀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당시 철학을 전공하던 나로서는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내 책장 구석에 꼽혀진 “묵공”의 빛이 세월의 때로 인해 바래어갈 무렵, 서점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 표지에는 참으로 반가운 광고문구가 적혀있었다. “묵공의 작가 모리 히데키가 또 한 번 세상을 뒤흔든다!” 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책을 들고 계산대로 가서 얼른 계산을 한 뒤 집으로 곧장 돌아가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작가의 신작을 읽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나에게 문화적 충격과 함께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었던 작가의 신작이라니!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 “정의의 포박”이라는 모리 히데키의 신작은 아직 1권밖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묵공”을 재미있게 본 독자라면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자 2권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일단 그림이 더욱 좋아졌다. 세월의 무게와 함께 그림이 좀 더 간결해지고 깔끔해졌으나 중후함과 깊이가 더해진, 무언가 작가가 진일보한 듯한 느낌이 읽는 이에게 강하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시대극이다! 이 작가는 정말 시대극에 잘 어울리는 작가라고 생각되는 것이 연출, 그림(특히 주인공들의 복장과 시대 및 공간 배경), 스토리가 매우 고풍스럽고 여유롭다. 마치 여백의 미가 잘 표현된 수묵화를 보는 것 같은, 먹과 펜선이 잘 조화된 그림 속에 그 시대의 인물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면을 놓고 “묵공”과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묵공”이 스펙터클한 역사를 소재로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이번 “정의의 포박”은 잘 만들어진 시대극 드라마 같은 느낌이 매우 강하다. 18세기 에도의 빈민촌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짧아 실존인물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 주인공을 두 명으로 내세운 설정이 매우 신선하고 독특하다. 먼저 작품의 메인 주인공이 되는 남자는 오오제키까지 올라갔다가 요코즈나 선발전이 열리던 전날, 갑자기 증발하여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스모꾼 타마츠바키 하나타로다. 정인이었던 여인이 요코즈나가 되면 자신을 버릴 것이 두려워 약을 먹여 선발전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이에 격분한 하나타로는 그 여인을 집요하게 책망하여 결국 자살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사랑했던 여인과 부와 명예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린 하나타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빈민촌의 한 구석에서 스스로 목숨이 끊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그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주는 것이 또 한 명의 남자 주인공 하세가와 헤이조우다. 하세가와 헤이조우는 에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로 우리 식대로 한다면 포도대장 같은 사내다. 워낙에 수완이 좋고 사건의 전후관계를 밝혀내는 추리력이 뛰어나며, 곧은 성품과 탁월한 행동력까지 갖춘 관리의 이상향 같은 남자로 별명이 ‘에도 도깨비’라 불리울 정도의 무서운 판관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병에 걸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우연한 계기로 절망의 늪에 빠진 하나타로를 구해주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면서 하나타로의 곧은 심지에 반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울 것을 결심한다. 하나타로가 마음의 문을 연 후부터 하세가와는 사건 현장마다 하나타로를 자신의 비서처럼 대동하고 다니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판관으로서의 자긍심과 올바른 정신을 심어준다. 하나타로는 하세가와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거동하기 힘든 ‘에도 도깨비’ 하세가와를 업고 뛰어다니면서 때로는 보디가드를, 때로는 비서 역할을 옆에서 묵묵히 수행하며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인 소재이고 익숙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작품에 몰입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도 없다. 작가의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었기도 하겠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사람이 사람을 해하고, 사람이 사람을 속일 때는 무언가 절실한 이유가 있는 법이며 그것은 항상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와 맞닿아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역시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기본이며 그것이 인간이 만든 사회라는 시스템을 저변에서 묵묵히 지지해온 기둥 같은 것임을 모리 히데키는 신작 “정의의 포박”을 통해 차분하고 묵직하게 보여준다.